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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Oct 31. 2018

여름은 역시 맥주입니까

[Day 7] 여름

1.

타고난 기질 외에 내 '체질'을 결정했을 유년기를, 나는 해발 700미터 산중턱에 만들어진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그땐 지구온난화 같은 건 '스카이넷'*만큼이나 와닿지 않는 개념이어서 그 도시는 한여름에도 기온이 영상 27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어요. 대신 10월 중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4월 초에나 그칠만큼 '설국'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동네였지만.

그래서 보통 내게 여름의 이미지는 '청량함'이었습니다. 한낮의 태양은 뜨거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해질 무렵부터 해 뜨기 전까지는 제법 기분 좋은 서늘한 공기 속에 잠들 수 있는. 도시가 자랑하는 산과 계곡에서는 '춥다'고 느껴질만큼 냉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오기도 하고, 그 온도만큼의 채도를 띤 초록색들이 눈을 시원하게 하는. 그런 눈부신 흰 빛과 청록빛이 어우러진 풍경이 '나의 여름'이었지요.


2.

엄마의 직장 문제로 이사를 간 곳은 바닷마을이었습니다. 바다의 여름은 산의 여름과 정반대의 색과 온도였습니다. 타오르는 듯한 노란 빛과 탁한 에메랄드빛의 풍경이 나를 압도했습니다. 그리고 숨이 턱 막힐 듯한 뜨겁고 습한 공기도. 보통 사람들도 버티기 어려운 계절이었겠지만 서늘한 여름에 익숙한 저로서는 그 더위가 더욱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엄마가 말아주는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나 냉면, 매끼니 밥상에 오르는 오이냉국이나 주말의 특식이었던 물회 같은 별미, 학교를 다녀와선 바로 냉장고문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던 미숫가루, 동생과 함께 만들어 먹던 홈메이드 팥빙수 같은 것이 그나마 모래알처럼 빛나는 추억입니다.


3.

스무 살, 대도시에서 맞이한 여름은 유년기의 여름은 생각조자 나지 않을 만큼 불덩이처럼 뜨겁고, 바닷마을에 두고 온 가족들과 고향집의 냉장고가 사무치게 그리울만큼 외로웠습니다.

그 시절 여름의 정취는 오직 밤하늘을 쳐다보며 마셨던 맥주로만 기억되어 있습니다.


두 달이 넘는 꿀 같은 방학이었지만 여느 친구들처럼 해외여행이나 어학연수는 언감생심이었고, 다음 학기에도 계속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하루종일 버스를 갈아타며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해가 지면 기숙사로 돌아와 짐을 풀어놓고 소금에 절인 듯한 몸을 씻고 밖으로 나가 기숙사 앞 편의점에서 1300원짜리 캔맥주 하나 땄습니다. 안주는 700원짜리 초콜릿이었습니다. 한 모금 한 모금 생명수처럼 아껴 마시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콤한 과즙을 한껏 머금은 듯한 여자들과 한여름 싱싱하게 자란 푸성귀 같은 남자들이 산뜻한 단가라 티셔츠를 입고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내 앞을 오갔습니다. 그러다 인적이 드물어지면 하늘을 올려봤습니다. 소란스러운 도시의 조명 속에 별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뿌연 하늘. 그래도 그때도 달빛만은 여전했습니다. 삶의 흔적이라곤 방금 편의점에서 결제한 2000원 뿐인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달빛. 달빛 한 모금에 맥주 한 모금, 그리고 초콜릿 한 조각. 한 판 짜리 초콜릿을 열 두 조각으로 쪼개서 안주 삼았기 때문에 달을 열 두 번 쳐다보고 나면 나만의 작은 호사도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가 양치를 하고 이층침대로 올라가 조용히 잠을 청했습니다.


4.

한동안은 '여름이 더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만큼' 바쁘게 살았습니다. 매년 신랑의 생일이나 우리 결혼기념일에 맞춰 비싼 밥을 먹는 데이트를 하고, 한창 성수기의 휴양지를 찾아다니며 사진 몇 장과 몇 달치 카드값으로 남은 휴가를 즐기기도 하고, 창밖에선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집 안에선 난방과 제습제와 에어콘을 총동원해서 습기와의 전쟁을 펼쳤던 적도 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새 여름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고 가을이 대신 그 자리에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다가올 땐 존재감이 대단했는데 물러날 땐 소리 소문 없는 것이 여름의 성격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여름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마시는 맥주의 맛을 잊은 지도 오래되었네요.

올해는 운이 좋게도 언제든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얻었으니 어디 멀리 놀러갈 필요 없이 매일 밤 테라스에서 맥주 한 잔으로 휴가를 보내야겠습니다. 

물론 스무 살 때와 달리, 초콜릿 열 두 조각보다는 조금 더 맛있고 풍요로운 안주를 마음껏(...은 아니겠네요, 살찔테니...) 먹을 수 있고, 종종 투닥거리지만 따스한 내 편인 사람과 개 한 마리와 함께인 것이 다른 점이지만. 


괜한 설렘과 외로움에 들뜬 한여름밤을 식혀주는 맥주의 맛은 여전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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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터미네이터의 세계관에서 인류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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