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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Oct 31. 2018

별도 없는 한밤에 피카레스크

[Day 8] MBTI

중세풍 술집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자 왈패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 귀를 틀어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워낙 시끄러웠고 그만큼 난장판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술집 안쪽부터 천천히 '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눈에 띄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바로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가 앉은 바(BAR) 옆에 자리를 잡고 미드주(mead酒 : 꿀을 삭혀 만든 술. 발효주의 시초라고 알려짐)를 한 잔 시켰다. 유쾌한 드워프처럼 생긴 술집 주인이 커다란 케그잔에 막걸리 같이 생긴 우윳빛 액체를 가득 담아 내게 건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내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 정체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럴 법도 했다. 나는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고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요, 티리온 씨."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소문대로 얼굴 한가운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선명했다. 대여섯 살 배기의 그것보다 짤막해보이는 팔다리와, 그 끝에 뭉툭하게 돋아난 것처럼 달려 있는 손과 손가락. 머리는 비율에 맞지 않게 커다래서 곧 뒤로 넘어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내가 이때까지 봐온 그 어떤 남자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나는 '당신의 후계자가 될 사람, 당신 복수의 정점을 함께 할 사람, 당신의 왕국이 설 때 당신의 오른편에 있을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당신은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하는 표정으로 당혹스러워 하다가, 낯선 이의 알은 체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깨닫고 이내 곧 표정을 감추었다. 


"나는 당신 만큼이나 세상의 혼란을 바라요. 정의는 간데 없는 이 세상이 정화되려면 극한의 혼란 끝에서 다시 세워지는 것 뿐이에요. 그리고 그 혼란과 재생은 반복되죠. 영원히. 당신과 나 같은 혁명가들에 의해."

"아니, 그건 내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야."


티리온은 자기 몫의 술을 마시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일종의 테스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당신이 원하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그렇다면 내 적들은 어떻게 처리할 거지?"

"당신의 적들에게 새로운 원한을 가질 만한 또다른 적들을 소개시킬 거에요. 나는 입 속의 혀처럼 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입 속의 매복사랑니가 될 거에요. 그래서 내 적들의 신경을 긁고 또 긁고 또 긁을거에요."


내 대답이 꽤 흡족스러웠는지 티리온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비치는 듯 했다.

그가 내게 무슨 대답을 하려는데, 그 순간을 잘라먹고 바람결에 속삭이듯 가볍지만 따끔한 목소리가 찌르고 들어왔다.


"어째서 다른 사람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이리도 만족스럽게 말하는 걸까?"


뒤를 돌아 보니 빅토리아풍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민 여자가 모자의 베일을 걷으며 우리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윤이 나는 탐스러운 검은 머리, 흰 피부, 붉은 입술,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여자는 화려한 미인이었지만, 온통 검은색 벨벳과 레이스를 휘감고 있어 퍽 위험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당당하고, 매력적이고, 영민한 것 같은데... 어째서 본인만의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 거야? 세상 잘난 모든 인간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맨 앞이자 맨 위에 서 보지 않겠어? 이 아이린 애들러처럼?"


여자는 내게 자신의 얼굴을 바싹 들이대곤, 검지손가락으로 내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신선한 생화에서나 맡을 법한 짙은 장미향이 코끝을 찌르고, 이게 무슨 향수였더라...생각에 빠졌는데 그 순간 연체동물 같은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우리 사이에 스르륵 끼어들었다.


"그건, 혼자 가는 길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지. 아이린 네가 노처녀인 이유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나요, 세뇨리따?"


화려한 헤어장식과 양팔 그리고 열 손가락에 걸친 장신구로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여자의 손을 내 얼굴에서 떼어냈다. 아이린은 불결한 것이 묻기라도 한 듯 장갑을 벗어 남자의 손이 스쳤던 자신의 팔목의 먼지를 털어냈다.


평범한 사람들을 그럴 싸한 말로 꾀어내어 그들의 희생으로 자기 몫을 챙기는 걸로 유명한 해적. 캡틴 잭 스패로우.

나는 그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바로 쏘아붙였다.


"당신과 함께라면 재미는 있을거에요. 죽을만큼. 언젠가 반드시 배신 당해서 악어 뱃속에서 뒹구는 신세가 될 테니까."


내 냉담한 반응에 의외라는 듯이 잭 스패로우는 특유의 시그니쳐 포즈-눈동자를 한 쪽으로 보내 시선을 피하고 어깨를 으쓱하기-를 취하며, 민망한 듯 오른손에 든 럼주를 들이켰다.


"똑똑한데?"

"응, 똑똑해."


반면 티리온과 아이린은 축배라도 들 듯 각자 손에 든 와인잔과 스카치 위스키잔을 부딪히곤 남은 술을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레이디, 말장난을 좋아하나본데 불장난은 어때?"


그 때, 반대편 바 모퉁이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박장대소하는 큰 소리가 아니라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부터 천천히 피치를 올려 높게 이어지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였다. 여덟 개의 눈동자가 그 웃음소리를 좇아 돌아갔다. 줄무늬 양복을 입은 꺽다리 남자가 남색 중절모를 벗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를 시커멓게 칠해놓아서 마치 해골의 안와와도 같았다. 반면 입술은 아주 빨갛게 칠했는데, 샤넬 립스틱으로 유명한 색깔이었다. 다만 이상한 건 립스틱을 양쪽뺨을 가로질러서까지 길게 이어놓아서 마치 입이 찢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니, 어쩌면 찢어진 입을 그렇게 가리고 있는 걸지도.


"이 난쟁이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은건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아는 아가씨니까 영웅이 만들어지는 방법도 알겠지? 원한다면 쓸만한 박쥐 한 마리를 소개시켜줄게. 이 난쟁이 대신 키우라구."


조커의 조롱에 티리온이 움찔하며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나도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로 대꾸했다.


"겨울쿨톤에 전혀 맞지 않는 그 립스틱 색깔이나, 세상 모든 걸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그 태도나, 어그로가 만렙이세요?" 

"겨울쿨톤? 어그로? 만렙? 그게 무슨 소리...?"


내 대답에 기가 찬 듯 조커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 이렇게 꼬시는 걸 알면, 야구방망이를 든 당신 와이프가 가만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깔깔 웃으며 내 말을 받는 아이린.

"그러니까 이 한심한 작자들이랑은 이제 그만 엮이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네 인생을 살렴. 원한다면 이 아이린 애들러는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널 원하니까."


물미역처럼 흐느적거리며 내 주위를 맴도는 잭 스패로우.

"나와 함께 모험을 떠나보는 건 어때? 배반 당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만큼 즐거울거야."


이 모든 것에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돌아 앉으며 그 도토리만한 검지 손가락을 세워 술집주인에게 미드주를 한 잔 더 부탁하는 티리온. 

"불에 미친 자뻑 광대에, 자기애 투철한 양성애자 소매치기에,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알콜중독 조증 해적 선장에, 그 대장으로 난쟁이라니. 아가씨, 무슨 할로윈 카니발 드림팀이라도 꾸리려는 건가?"


다섯 사람이 떠들어대는 소리는 시끌벅적한 술집의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들 모두 각자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 누구보다 독보적인 달변가에 이기적인 농담꾼들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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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검사를 해보니 ENTP-T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형이 나오네요.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는 ENFP형이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ENFP와 ENTP형이 오락가락하더니 결국엔 이런 타입에까지 이르렀네요. 


“가시밭길이더라도 자주적 사고를 하는 이의 길을 가십시오. 비판과 논란에 맞서서 당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히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별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는 것보다 순종이라는 오명에 무릎 꿇는 것을 더 두려워하십시오.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념을 위해서라면 온 힘을 다해 싸우십시오.” 

- 토머스 J. 왓슨


ENTP-T형의 해설 첫 머리에 있던 글귀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위 헛소리 낭낭한 글은, 같은 ENTP-T형이라고 나온 캐릭터들-티리온 리니스터, 아이린 애들러, 캡틴 잭 스패로우, 조커-과 이런 수다를 떨면 어떨까 하고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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