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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Oct 31. 2018

디씨형 인간

[Day 9] 취미

'취미가 뭐냐'는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 중에 하나다.


연필 드로잉, 수채화, 캘리그라피 등 '그리는 활동'을 좋아하고, 삼단 꽈배기 뜨기로 목도리를 만들거나 매직루프뜨기로 마하의 겨울니트를 만들어 줄 수도 있고, 향초나 디퓨저 같은 걸 만들어서 여기저기 선물하기도 하고, 등산과 바다낚시도 가끔 하지만 입문자 단계를 넘어서면 거기서 끝.

뭐든 하나 붙잡고 진득하게 파고든 적이 없어서 내게는 딱히 취미랄 것이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 3대 취미라는 독서, 영화감상, 음악감상을 '취미라고 말할 만큼' 안 하고 있다는 게 신선한 포인트랄까.


공식적으로 취미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보통 '사전 읽기'라고 말한다.

글자를 익히기 시작할 때부터 '문자편집증'이 의심될 정도로 뭐든 닥치는대로 읽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땐 아빠가 초등학생용 최신 국어사전을 사주셨는데, 분홍색 가죽표지가 너무 예뻐서 하루종일 끼고 ㄱ부터 ㅎ까지 읽었다. 좋아하는 단어들은 일기장에 따로 적어두기도 했는데 '갸륵하다' '국으로' '내핍' '덧없다' 이런 게 적혀 있는 걸 보면 열 살의 감성이란 과연 무엇이었는지.


초등학교 5학년 땐 팬티엄급(!) 컴퓨터를 사고 사은품으로 두산 백과사전 CD를 받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 전까지 방에 틀어박혀 그 백과사전을 0부터 Z까지 하나하나 읽었던 게 기억난다. 그 버릇은 나중에 30권짜리 학생대백과사전이 생겼을 때에도, 인터넷 위키백과가 생겼을 때에도 쭉 이어져 그나마 취미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턴 디씨인사이드 갤러리에도 제법 드나들었는데 특정 갤러리에 고정 유저로 활동한 게 아니라 처음엔 수십 나중엔 수백 개까지 늘어난 갤러리마다 돌아다니면서 '개념글'을 읽는 게 취미가 되었다. 바둑, 국방, 골프 같이 평소 별 접점이 없는 분야의 기본 지식들이나 거기서 노는 사람들의 분위기나 그런 걸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다. 덕분인지(?) 지금도 누구와 무슨 주제로 이야길 하든 '어느 수준까지'는 막힘 없이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비할 덴 못되지만 과거에 이런 사람들을 '다빈치형 인간'이라고 불렀다면 나는 '디씨인사이드 갤러리형 인간'일 거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당시 다른 취미는 여기 저기서 얻은 잡지식으로 네이버 지식인에 답변을 다는 것이었다. 공연/뮤지컬 분야에선 탑10 답변가에 등극하기도 했다. 이건 '퀴즈 풀기'와 같은 취미와도 연결되어서, 대학교 1학년 땐 생방송 퀴즈쇼에 나가서 상금을 타기도 했다. (9단계에서 탈락...) 요즘은 틈틈이 라이브 퀴즈쇼에 참여한다. (밥 먹느라 거의 못하지만...) '누가 물으면, 답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아는 게 많은 루나, 하지만 그 중 절반은 틀림"이라는 기믹이 생겼다.


이런 활동의 산물로 지식검색 콘텐츠를 기획하고 서비스하는 일은 내게 '꿈의 일'에 가까웠다. 물론 지금은 그냥 일.


비공식적으로 취미를 말할 땐 '안주 만들기'라고 말한다. 술안주 맞다.

한동안은 매일 저녁 퇴근시간 즈음에 '오늘은 무슨 술을 마실까!'하는 고민과 함께 자연스레 '주종'에 맞는 안주를 떠올려 퇴근길에 장을 보고 집에 들어가 1시간 남짓 요리해서 남편과 한 잔 기울이며 그날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낙이었다. 덕분에 결혼 후 체중이 10킬로그램 불어난 건 불행이지만. 더이상 이걸 안 하게 된 이유는 건강을 위해 절주를 시작했기 때문인지, 나도 남편도 미친듯이 야근이 늘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의 신혼이 진즉 끝났기 때문인지.


그래도 매주 금요일밤이면 우리만의 소소한 파티를 벌인다. 주말에는 외식도 배달음식도 없이, 집밥으로 여섯 끼를 다 챙겨먹는 편이다. 어제 저녁메뉴는 만둣국이었다. 오늘은 비빔국수와 삼겹살구이, 치킨너겟과 쥐포구이와 낮맥, 후랑크소세지를 곁들인 새우볶음밥으로 세 끼를 먹었다. 내일 아침은 토스트와 키위, 딸기바나나주스로 느지막히 아침을 먹고, 점심엔 남은 삼겹살로 챠슈동을 만들 예정이다. 저녁 메뉴는 아직 미정인데, 지난 주에 사놓은 제주산 치즈가 너무 맛있어서 토마토 바질 스파게티가 또 등판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모아보니 결국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며 그들과 이런 저런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랜드 오픈 집들이 플랜을 개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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