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4] 여행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웃도어 활동 자체를 즐기지 않습니다.
집순이 레벨4(침순이 :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음)가 일으킬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은 '밍기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뭔가 사회적(?)으로 여행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기 저기 많이 놀러다녀라.' '너흰 애도 없잖니' 뭐 이런 쓸데 없는 멘트까지 덧붙여서요. (개는 있습니다만?) 항공사 마일리지와 연동되지 않는 카드를 쓰는 게 뭐가 이상한 일인가요. 주말 동안 도합 200걸음도 걷지 않는 사람이 비행기를 탈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딱히 여행이 즐겁지 않다거나, 나쁜 추억만 있었다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되짚어 보면 즐거운 기억들 뿐이었어요.
신혼여행지였던 괌에서 외진 곳에 있는 미국 남부 가정식 레스토랑을 찾아 가다가 실수로 앤더슨 공군 기지 앞까지 가버리는 바람에 당황해서 후진했던 일.
마카오 베네치안 호텔에서, 새벽 2시 반, 곤히 자고 있는 와중에 신랑이 헐떡이며 들어와 2000달러만 더 내놓으라고(..) 포츈오브휠이 돌고 있다고(..) 헛소리를 하다 마누라의 손길로 등짝을 맞은 일.
발리 꾸따 비치 근처의 근사하지만 저렴한 레스토랑에서 해질 무렵부터 한밤까지 갖은 해산물 요리와 칵테일을 먹고 마시며 신랑과 무려 네 시간동안 수다 떨었던 일.
홍콩 셩완 이비스 호텔의 창 밖으로 야경을 바라보며 편의점에서 사온 술과 안주로 여독을 달래며 '내년엔 이렇게 창이 큰 집으로 이사가자'하고 다짐했던 일. 그래서 다음 날 찾아간 만모우 사원에서 관우의 붓 대신 창 끝을 만지고 대운을 빌었던일. (이렇게 하면 재복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베트남 나트랑의 풀빌라에서 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침대에 파묻혀 대실 해밋의 단편집을 내달려 읽었던 일.
홋카이도 후라노 팜 도미타를 찾아갔다가 엄청난 더위와 시골냄새에 대실망하고 크게 싸울 뻔 했다가 삿포로역 유니클로에서 한정판 띠어리 콜라보 제품을 싹쓸이하며 다시 화해한 일(..)
하지만 역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을 꼽으라면, 매주 토요일 굽네치킨을 시켜먹으며 '무한도전'을 보며 깔깔거렸던 추억이었어요. 지금도 추울 땐 따뜻하고, 더울 땐 시원한 '우리 집'에서 맛있는 거나 해먹으면서, 책 보다가 졸릴 땐 자고, 심심하면 서로 괴롭히고, 영화보면서 드립배틀 하고, 운전 걱정 없이 실컷 술 마시고 신랑과 마하와 셋이서 뒹굴거리는 게 제일 좋습니다.
어차피 삶은 여행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