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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 Oct 31. 2018

when I'm gone

[Day 48] 유서

구체적인 설정 없이도 또렷이 그려지는 장면 몇 토막.


엄마는 숨이 끊길듯 애간장이 녹을듯 펑펑 울기만 하겠지. 살아있어도 결코 엄마가 바라던 딸일 리 없으니 그만 울어요. 

그런 엄마의 곁을 지키며 요나도 같이 울고 있을 것 같다. 마치 내 결혼식날처럼. 네겐 고마운 게 참 많은데 난 또 이 마당에 쓸데 없는 부탁이 하나 있다. 너 인스타그램 DM으로 보냈으니 좀 챙겨줘. 고맙고, 미안하다.


어쩌면 아빠는 먼 발치서 말을 잃고 15년 전 끊은 담배를 태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모든 게 아빠의 업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아빠의 남은 삶이라도 잘 돌봐주세요.


동생과 올케. 정말 미안하지만 부모님을 좀 부탁할게. 정말 미안해. 그리고 동생 관우한테는 특별히 한 가지 더 부탁. <komm susser tod>와 <Non, je ne regrette rien>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대장님, 마하는 잘 있어? 마하가 먼저 무지개 다리 건너 오랜 시간동안 우릴 안 기다리게 해서 다행이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코기별로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삶의 대부분의 흔적들은 대장님과 함께 있을텐데 그게 뭐가 됐든 남김 없이 다 버려줬음 좋겠어. 쓰다 만 소설더미가 가득 차 있는 외장하드랑 구글 드라이브랑 네이버 블로그도 물론 포함이야. 브런치는 작가가 사망하면 어떤 프로세스로 폐쇄되나 모르겠다. 그냥 다음고객센터에 문의해. 가뜩이나 게으른 양반한테 이런 거까지 시키게 되서 미안. 대신 화장대 왼쪽 서랍에 있는 서류들은 절대 버리면 안 돼. 내 사망보험금을 수령하려면. 아, 회사에 청구해야 하는 건 수진선배에게 물어봐, 잘 도와줄거야. 내가 언질해놓은 게 있어서 마누리 사망보험금이나 밝히는 냉혈남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걱정이 많을 때면 항상 수능시험을 다시 치르는 악몽을 꿈다고 했지. 이제 더 이상 내가 액막이무녀처럼 옆에 누워 함께 잠들어 그런 악몽들을 막아줄 수는 없겠지만... 대신 당신 꿈에 나타나서 그 문제들 다 풀어줄게. 올1등급 자신있으니까, 이제 괴로워하거나 슬퍼하는 일 없었으면 해. 


나는 바다보다 산을 좋아했으니까, 화장하고 나면 태백산 천제단 근처에 몰래 뿌려주라. 내 탄생의 기원이 거기니까 마무리도 거기사 해야하는 게 맞겠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말도 안 되는 추억보정으로 행여나 날 그리워하지 말아줘. 나는 충분히 행복했고 기껍게 살다 갑니다. 여러분도 새로운 날 속에서 또 새로운 추억들을 쌓아가세요. 내 시간은 여기까지였고,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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