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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Jun 15. 2021

한 여름밤의 기억

기억을 소환하는 그날의 냄새

 거의 매일 집 앞 공원에서 저녁 산책을 하다 보니 이제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생겼다. 몸이 많이 불편해 보이는 한 할아버지는 굽은 등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절뚝거리면서도 꼭 저녁 운동을 나오신다. 핸드폰으로 애청곡을 틀어놓고 숨을 헐떡이시면서도 최선을 다해 트랙을 몇 바퀴 도시곤 운동기구에 앉아 한숨 돌리시는 모습을 여러 번 뵈었다. 그럴 때마다 파워워킹을 하겠다며 그 옆을 빠르게 추월해 가는 것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딱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저 좀 젊다는 이유로 그 어르신 옆을 그렇게 쌩하니 비켜가는 것에 묘한 죄책감이 생긴다. 한 아주머니는 매번 핸드폰으로 커다랗게 트로트 음악을 틀어놓고 열심히 공원을 걷는다. 우리 옆을 지날 때마다 커다랗게 들려오는 소음 같은 음악소리에 얼굴을 찡그리기도 여러 번.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니 같이 걷던 꼼군이 "우리도 음악 한번 틀어볼까? 다만 좀 세련된 걸로?" 라며 웃는다.  


 날이 더워지고 해가 길어질수록 저녁 늦게 아이들과 밤마실을 나온 부모들도 많아졌다. 오늘은 한 아이가 자전거를 연습하러 나왔나 보다. 생각처럼 아이가 중심을 잘 잡지 못 하자 답답해진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순간 공원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될 만큼 언성이 높아졌다. "페달을 계속 굴려야 돼.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가 멈춘다고!" 멀리서 보아도 아이는 이미 주눅이 들 대로 들었고 불과 얼마 전 나도 같은 경험을 했기에 남일 같지가 않다. '그래도 저렇게 윽박지르면 안 될 것 같은데...'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이를 한번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파이팅' 응원을 한다. 체육공원 입구에 있는 농구코트는 중고등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의 차지다. 이 더위에도 착실하게 마스크를 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땀을 뺀다. 우리처럼 함께 밤 운동을 나온 듯한 한 부부는 양손에 물통을 하나씩 쥐고 달밤 체조에 나섰다.


 이렇게 바람 한점 없는 여름날 저녁, 아직도 빛이 남아 있는 이때가 되면 항상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길어진 해 덕에 저녁 먹을 시간이 된지도 모르고 아이들과 함께 땅따먹기며 고무줄놀이, 얼음땡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으면 엄마가 "얘들아 저녁 먹어라~"라며 동생과 나를 부르러 나오셨다. 그제야 하나둘씩 불을 밝힌 집들이 많아진 것이 보였고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된장찌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러면 하루 종일 먹는 것도 잊고 노느라 허기진 배를 이끌고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며 내일을 기약하던 기억. 그때 그 여름밤의 냄새가 어디선가 실려오는 것만 같다. 풀벌레 소리 가득하고 조금만 어둑한 곳에 갈라치면 이제 막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모기들에게 왕창 팔다리를 물 뜯겨 흰색 모기약을 덕지덕지 칠해야 했다. 어쩌다 소독약을 뿌려대는 방역 트럭이라도 오는 날이면 몸에 해롭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방귀를 뿡뿡 뿜어내듯 뿌연 소독약을 뿜어내는 소독차 꽁무니에 바짝 붙어 쫓아다녔다. 매캐한 냄새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아 엄청 신이 났고 밤이 될 때까지 머리에 밴 그 소독약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집에 가면 엄마에게 혼이 나곤 했다.


 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내게 시절의 한여름밤이 이토록 생생한 건 그날의 냄새와 이 여름밤의 냄새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녹음이 짙어져 오는 여름밤의 풀냄새와 매캐한 소독약 냄새, 내게서 나던 땀냄새와 그리고 어느 집 부엌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을 된장찌개 냄새가 섞여 그때의 추억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다.  아무 걱정 없이 마냥 행복했던 아이의 기억 속 나는 천진난만하기만 하면 됐고 아무것도 신경 쓰거나 걱정할 거리 없이 그 순간이 즐거우면 됐다. 그리고 그 속엔 우리의 이름을 외쳐 부르던 젊고 예쁜 우리 엄마의 모습도 보인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을 우리 엄마도 우리 자매를 데리러 나올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뛰어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하고 대견하고 또 어느새 이렇게 컸나 아쉬운 마음... 이 곳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지금 이 순간이 아이들에게도 부모들에게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을 생각하니 흐뭇하다.


 한참을 그 시절 생각에 잠겨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가로등이 훤히 밝아졌다. 왁자지껄 부산스럽던 아이들도 집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기고 어느덧 공원에 게 드리운 어둠에 그 많던 사람들 온데간데없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초승달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고 여름밤의 냄새에 한껏 취한 나도 비로소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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