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발견의 날

나에게만 집중하기

by 지오바니

오늘 아침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제까지 온 세상이 폭설로 꽝꽝 얼어붙어 내 몸과 마음까지 움츠리게 하더니, 이제 그 맘 다 안다는 듯 따스한 부슬비가 내려 조용히 언 땅과 내 마음을 녹여준다. 이런 날은 '이불 밖은 위험해'가 되는 날이다. 마냥 따뜻한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은 날. 그래도 내 루틴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이불 밖으로 무거운 한 발을 내딛는다.


우리 집의 가장 큰 장점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워낙에 작은 마을이기도 하고 그 마을 안에서도 우리 집은 옆집과의 거리가 최소 50미터 이상이어서 평소에도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게다가 저번 주에 내린 폭설로 이럴 때면 모두들 밖으로 나올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눈길에도 어김없이 우리 집을 방문해주는 쿠팡 맨이 기다려질 정도. (그렇다, 우리 동네에도 로켓 배송이 된다!)


육지에서의 소음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 정적에 적응하는 것에 시간이 좀 걸렸다. 처음엔 자동차 소리, 아이들이 밖에서 떠드는 소리, 쿵쾅 거리는 층간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그 고요함이 마냥 무서웠다. 그러나 곧 그 소음 대신 우리 집 마당을 찾아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조용해진 주변 환경에 맞춰 내 마음도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은 고요함을 벗 삼아 난로 앞에 앉아 한참 불멍을 한다. 오로지 불꽃만이 이 고요함을 깨며 하늘을 날 듯 '탁, 타탁' 튀어 오르고 난로의 '웽~' 하는 기계음이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함께 리듬을 만들어 내면, 난 마치 음악 감상을 하듯이 그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간절한 팔을 내뻗듯 타오르는 불길이 금세 사그라질 듯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타오르는 것을 보며 강한 생명의 의지를 느끼는 건 내가 너무 센치해진 탓일까.


이 평화로움을 깨고 싶진 않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눈 예보가 있다.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2-3일은 또 밖에 나가기 힘들 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며칠 전 봐 둔 미디어아트 뮤지엄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높은 입장료에 잠깐 머뭇거렸지만 오늘은 지적 자극이 엄청 간절한 날이니 좋은 곳에서 맛있는 밥 한 끼 먹었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눈 앞에 펼쳐진 살아 움직이는 명화들과 반딧불,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제주의 풍광들에 넋을 놓고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실사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 알면서도 시각적인 자극이 이렇게 강렬한 거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렇게 좋은 것을 볼 때마다 가족 생각이 난다. 아이와 남편이 생긴 지 어느덧 10년, 이제는 맛있는 걸 먹어도, 좋은 곳에 가도, 혼자라면 그 감흥이 예전 같지 않다. 색연필로 동물 그림을 그려 자신의 그림을 화면에 띄워보는 체험장이 아이들로 가득했다. 그림을 엄청 좋아하는 우리 아이와 함께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의 그림이 화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면 팔짝팔짝 뛰며 신나 했을 텐데...... 아쉬움에 한참을 그곳에 서 있다가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은 제주에서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보낸 하루다. 시간대별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고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제주를 느꼈다. 운전을 하다가도 예쁜 억새풀이 보이면 바로 길가에 차를 대고 사진을 찍고, 그러다 발견한 시골 동네의 작은 카페에 들러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 카페의 창에 쓰여 있던 소소한 글귀에 감동을 받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찾은 내가 반가웠고 더 이상 혼자 있음이 두려움이 아닌, 나에게 완벽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중한 발견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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