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의 혹한기 체험

마음만 편하다면 그곳이 어디든...

by 지오바니

어젯밤부터 내린 눈은 앞으로 5일간이나 계속해서 내릴 예정이다. 이 말인즉슨, 앞으로 5일간은 바깥 구경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어제 비상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간 마트는 차 댈 곳이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즉석밥과 인스턴트 국 같은 종류는 매대마다 전부 텅텅 비어 있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모두들 나처럼 대설을 앞두고 식료품을 사러 온 것 같다. 제주 사는 지인도 전화로 먹을 것 많이 사놓으라며 다음 주까지는 못 움직일 거라고 경고를 해준다.


제주에서 혹한기 체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59년 만에 처음으로 한파경보도 내릴 예정이라고 하니 긴장이 된다. 제주는 좀처럼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한라산 온도가 영하 15도를 기록할 것이라는 예보 만으로도 벌써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

게다가 제주에선 눈이 됐든 비가됐든 위에서 아래로만 내리지 않는다. 심한 바람에 사선으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기도 하는 눈보라 속에 있다 보면 사방으로 솟구치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때려 맞느라 정신이 없다. 혹시 몰라 서울에서 가져온 털모자를 제주에서 이렇게 유용하게 쓰게 될 줄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나 눈이 예보된 날 저녁이면 항상 출근길 걱정에 근심이 많았다.

특히 월요일 아침의 비나 눈 예보는 지각 통보와 마찬가지였고 꽉 막힌 올림픽 도로에 가까스로 진입해도 30킬로미터 남짓 거리를 2시간 걸려 가야 하는 그 아침이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다.

최근 코나 바이러스로 많은 회사들이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가 아니면 절대 재택근무를 할 리 없는 회사를 다니는 덕에(?) 단 하루도 그 교통지옥을 벗어날 수 없던 작년을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따스한 방 안에서 저 눈보라를 바라보는 것이 비록 현실은 혹한기 체험에 고립일지라도 마음은 훨씬 편안하다.


'내가 처한 상황과 현실에 따라 같은 것도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구나......'

만 오면 부스스해지는 곱슬머리를 가진 탓에 평생을 싫어하던 비는 지금의 내겐 목마른 정원의 나무를 촉촉이 적셔줄 단비가 되었고, 또 물이 부족한 제주 중산간 마을의 단수를 막아줄 생명수가 되었다. 이 작은 집을 집어삼킬 듯 커다란 눈보라를 일으키며 내리는 눈은 자연의 위대함을 일깨워주고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주는 아름다운 캔버스처럼 보인다. 무서운 굉음처럼 들리던 커다란 바람소리마저 익숙해졌고 이젠 바람이 그친 후 찾아오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그 찰나를 기다리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나 빨리 제주에 적응해버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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