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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Jul 23. 2021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여행

옷장으로 출발!

 요즘 아이가 내 옷 입기에 푹 빠져있다. 내가 20대 때에는 몸에 쫙 들러붙는 티셔츠에 통바지가 유행했었다. 그때 사놓은 XS사이즈의 티셔츠들이 우리 아이의 타깃이다. 대부분 몸통은 잘 들어맞고 길이가 약간 긴 듯 하지만 엄마옷 뺏어 입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좀 짧다 싶은 원피스들도 이제 웬만하면 아이한테 양보하는 중이다. 20년 전 옷들이 아직도 장에 있다는 것이 놀라울 수 있지만 내게는 아주 당연한 일이다.


 워낙 물욕이 없는 터라 마지막으로 옷을 구입한 것이 1년 반도 넘었다. (화학섬유 쓰레기를 덜 만들겠다며 환경보호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전에도 솔직히 많이 사는 편은 아니었다.) 이는 태생적으로 옷이며 가방, 신발 등 나를 꾸미는 것을 사는 데에는 딱히 관심이 없기도 하고 왜 똑같은 디자인의 옷들을 계절마다 계속 사야 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도 하다. 이뻐 보여 구입하면 항상 내 옷장엔 예전에 산 그와 똑같거나 적어도 비슷한 옷이 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젠 똑같은 옷들을 계속 사다 나르는 바보 짓은 멈추기로 했다.  

 어쩌면 무슨 옷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어떤 옷들을 사야 좀 더 양한 패션을 선보이며 옷을 입을 수 있는지 몰라서 일 수도 있다. 스무 살이 넘어 유학 가기 전까지도 엄마가 사다준 옷만 입었으니 이 정도면 그 방면으론 거의 무지하다고 봐도 된다. 그렇기에 내 옷장들은 영국에서 런더너들의 멋지고 독특한 패션을 보며 그들을 쫓아 산 옷 혹은 한국에 돌아와 회사에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입시절에 사놓은 오래된 세미 정장이 대부분이다. 이 중 영국에서부터 가져온 옷들은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스타일이 많아 구입한 지 10년이 넘는 그 옷가지들여전히 옷방 한구석을 꽉 채우고 있다.


 어느 날은 아이가 그 오래된 옷 들 틈에서 나도 잘 입지 않는 짧은 베이지색 끈소매 티를 찾아냈다. 정장을 입을 때 아주 가끔씩 재킷 안에 받쳐 입던 것이었는데 아이는 자신한테 딱 맞는다며 내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신나 한다.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언제 이렇게 컸나 그저 신기방기 할 따름이다. 아이는 내친김에 할머니에게 자랑을 한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에엥~ 나 이거 안 입어!" 하며 울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냐며 쫓아 들어가니 반대로 할머니는 배꼽을 잡고 뒤로 넘어갈 만큼 크게 웃고 있는 중이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내게 엄마는 "그 옷, 내가 처녀 때 명동에서 산 옷인데 어떻게 그걸 찾았니?" 하신다.

아이는 할머니가 입던 옛날 옷은 싫다고 찡찡대며 금세 훌러덩 벗어버렸고 나는 도대체 40년 전 옷이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 있는지 그저 놀울 뿐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옷이 어떻게 내 옷장에 들어 있는지 그 시작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어딘가 항상 있었고 아주 가끔 필요할 때만 입었으니 세탁도 많이 안 해서 원형보존이 쉬웠으리라.


 휴직을 한 이후론 옷을 사기는커녕 기존에 있는 옷을 입을 일도 없어졌다. 종일 집에 있는 내가 내놓는 빨래는 요가복 2벌과 집에서 입는 옷 한두 벌이 전부다. 하지만 반대로 요즘 외모 가꾸는 것에 눈을 뜬 아이는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한다. 위아래 스타일과 색을 고려하여 맞춰 입고선 꼭 가족들에게 점검을 받는다.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집을 나선다. 끔씩 내 옷을 입고 나설 때도 많은데 아이는 엄마 옷을 입었으니 자신이 꽤 어른에 가까워진 것 같다며 연신 글벙글다. 늘도 심심했던지 내 옷장을 서성이던 아이가 옷을 하나 골라 나왔다. "엄마! 나한테 이거 맞을 것 같은데?" 신나 하며 입어보는 아이를 보니 귀여워 웃음이 난다. 전부 자신의 나이보다 더 오래된 옷 들인데 그것들이 뭐 그리 좋다고 신이 난 걸까.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방면으론 아이는 날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스스로 패셔니스타라고 자부하는 아빠를 닮았거나 아니면 내가 입기만 하면 좋아 보인다며 다 뺏고 싶어 하던 내 동생,  그러니까 이모를 닮은 것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아마도 몇 년 만 있으면 낡디 낡은 내 옷 따윈 쳐다보지도 않을 날이 올 것이 분명하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소박하다 못해 낡은 내 옷들을 입고 즐거워하는 아이와 함께 이 시간을 맘껏 즐겨야겠다. 이 순간만큼은 그 오래된 옷들이 아이의 웃음으로 다시 새 생명을 얻은 듯 반짝거린다. 꼭 그 옷을 처음 샀을 처럼 말이다. 그와 함께 얼굴에 젖살 가득 통통했던 나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 얼굴이 오버랩된다.


이렇게 요즘  아이와 시간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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