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다녀온 뒤로 영 속이 편치 않다. 밀면에 보말칼국수에 몇 년 만에 용기 내어 먹은 라면까지. 갑자기 너무 많이 먹은 밀가루 음식 탓인가... 계속 찜찜하게 속이 불편하다.
3년 전 갑자기 찾아온 원인 모를 위 무력감으로 1년여를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아프긴 싫은데... 그때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것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 뼈저리게 느꼈다. 오로지 죽과 연한 나물 외에는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탓에 가뜩이나 살집도 별로 없는 편인 몸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거울 보기가 무서웠다. 옷 사이즈가 한 치수 줄어드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다음엔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정말로 겁이 났다. 안 그래도 긴 머리라 기본적으로 감을 때마다 빠지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인데 머리를 감지 않을 때도 머리카락이 숭숭 뽑혀 어깨에 내려앉았다. 평생 한 손으로 잡기도 힘들 만큼 많은 머리숱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그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다들 이 나이쯤에 한 번씩 아프다는 말에 위안을 삼아 보려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 불편함은 도저히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문제인지라도 알면 좀 나았을 텐데 병원에서도 명확히 어떤 병명인지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위내시경에 초음파, 피검사, 엑스레이 등등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봤지만 양학에서 말해줄 수 있는 정확한 소견은 없었다. 그러는 중에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이젠 몸에 들어가는 모든 약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약에 부작용을 일으켜 오한에 벌벌 떨며 밤을 지새우길 몇 차례 결국 병원에서는 수액밖에 넣어줄 것이 없다며 퇴원을 종용했다.
그 당시 회사에는 한창 바쁜 시기였고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었다. 배가 아파온 건 하필 가장 중요했던 행사 오프닝 날이었다. 전날 싸놓은 3박 4일 출장 짐을 그대로 들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하면 회사에 갈 수 있을 줄 알았고 어떻게든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사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기는커녕 상태는 더 악화되어만 갔다. 그렇게 결국 나는 그날 회사를 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담당 직속 임원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그런데 제 몸이 마음대로 안 되네요..." 그때 느꼈던 무력감과 허무함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을 한 뒤에도 내 머릿속은 오로지 회사 생각뿐이었다. 전화기를 부여잡고 안절부절 좌불안석, 온 정신은 회사를 향했다. 그러니 상태가 좋아질 리 없었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병원을 뒤로하고 퇴원한 후에도 난 집 대신 회사를 택했다. 팀장이라는 책임감에 떠밀렸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성격상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상태를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힘겹게 퇴원을 한 후 말리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밤늦게 행사장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픈 몸을 부여잡고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용을 썼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얼굴이라도 비춰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강행한 출근은 결국 그날 새벽 응급실에서 끝이 났다. 팀원들은 백지장 같은 얼굴로 잘 걷지도 못하는 나를 보며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제야 내 빈자리까지 채우며 힘겹게 일하고 있는 팀원들에게 폐를 끼칠까 싶어 조용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약 1년 여가 걸렸다. 그것도 평소에 미덥지 못하게 생각했던 한방의 도움을 받아서다. 수소문해서 찾아간 위 전문 한방병원엔 나처럼 삐쩍 마른 사람들로 가득했다. 병원 라운지에는 그곳에서 치료받고 말끔히 나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반복되어 플레이되고 있었다. 그걸 보니 왠지 나도 금방이라도 나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1시간을 넘게 기다려서 만난 원장님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내 위를 만지자마자 심각한 상태라며 위에 독소가 쌓인 채 굳어 위가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했다. 병명이 무엇이든 일단 무어라도 진단을 받았다는 것에 안심이 됐고 병원 로비에서 봤던 그 간증 동영상에 홀려 그곳에서 처방하는 대로 보험도 안 되는 비싼 약들을 짓고 물리치료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약을 먹지 않았어도 1년이나 음식을 조심하고 신경 썼다면 자연히 낫지 않았을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그 당시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고 그 약들과 치료는 내게 지푸라기 그 이상이었다. 적어도 플라세보 효과를 주기엔 충분했고 진짜로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큰 중병을 앓은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투병은 하찮은 에피소드 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인생 통틀어 그렇게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처음이었고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상상 이상의 두려움과 무력감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 시간들을 겪으며 깨달은 건 놓아야 할 때 놓지 않으면 후에 더 큰 시련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의지가 아닌, 어쩔 수없이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련하게 굴지 않아야 한다. 3년 전의 나처럼 말이다. 돌아보면 '왜 그리 회사일에 목숨 걸고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었을까'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나와 가족이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함이지 내 몸을 희생해서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겪어 보니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만 돌아간다. 휴직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내가 없어선 안 될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속이 불편한 날이면 다시금 그때의 교훈을 아로새긴다.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우쳐줬던 그 고통스러운 순간은 내 인생의 중요한 wake-up call이 되었다.
오늘은 소박하게 끓인 밥이나 먹으며 속을 좀 달래줘야겠다. 내 몸을 지킬 사람은 결국 나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