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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Jul 21. 2021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아프지 말자.

 제주에 다녀온 뒤로 영 속이 편치 않다. 밀면에 보말칼국수에 몇 년 만에 용기 내어 먹은 라면까지. 갑자기 너무 많이 먹은 밀가루 음식 탓인가... 계속 찜찜하게 속이 불편하다.


 3년 전 자기 찾아온 원인 모를 위 무력감으로 1년여를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아프긴 싫은데... 그때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것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 뼈저리게 느꼈다. 오로지 죽과 연한 나물 외에는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탓에 가뜩이나 살집도 별로 없는 편인 몸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거울 보기가 무서웠다. 옷 사이즈가 한 치수 줄어드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다음엔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정말로 겁이 났다. 안 그래도 긴 머리라 기본적으로 감을 때마다 빠지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인데 머리를 감지 않을 때도 머리카락이 숭숭 뽑혀 어깨에 내려앉았다. 평생 한 손으로 잡기도 힘들 만큼 많은 머리숱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그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다들 이 나이쯤에 한 번씩 아프다는 말에 위안을 삼아 보려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 불편함은 도저히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문제인지라도 알면 좀 나았을 텐데 병원에서도 명확히 어떤 병명인지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위내시경에 초음파, 피검사, 엑스레이 등등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봤지만 양학에서 말해줄 수 있는 정확한 소견은 없었다. 그러는 중에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이젠 몸에 들어가는 모든 약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약에 부작용을 일으켜 오한에 벌벌 떨며 밤을 지새우길 몇 차례 결국 병원에서는 수액밖에 넣어줄 것이 없다며 퇴원을 종용했다.


 그 당시 회사에는 한창 바쁜 시기였고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었다. 배가 아파온 건 하필 가장 중요했던 행사 오프닝 날이었다. 전날 싸놓은 3박 4일 출장 짐을 그대로 들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하면 회사에 갈 수 있을 줄 알았고 어떻게든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사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는 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기는커녕 상태는  악화되어만 갔다. 그렇게 결국 나는 그날 회사를 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했다. 담당 직속 임원에게 전화를 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그런데 제 몸이 마음대로 안 되네요..." 그때 느꼈던 무력감과 허무함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을 한 뒤에도 내 머릿속은 오로지 회사 생각뿐이었다. 전화기를 부여잡고 안절부절 좌불안석, 온 정신은 회사를 향했다. 그러니 상태가 좋아질 리 없었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병원을 뒤로하고 퇴원한 후에도 난 집 대신 회사를 택했다. 팀장이라는 책임감에 떠밀렸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성격상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상태를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힘겹게 퇴원을 한 후 말리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밤늦게 행사장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픈 몸을 부여잡고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을 썼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얼굴이라도 비춰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강행한 출근은 결국  새벽 응급실끝이 났다. 팀원들은 백지장 같은 얼굴로 잘 걷지도 못하는 나를 보며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제야 내 빈자리까지 채우며 힘겹게 일하고 있는 팀원들에게 폐를 끼칠까 싶어 조용히 다시 집으로 돌아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약 1년 여가 걸렸다. 그것도 평소에 미덥지 못하게 생각했던 한방의 도움을 받아서다. 수소해서 찾아간 위 전문 한방병원엔 나처럼 삐쩍 마 사람들로 가득했다. 병원 라운지에 그곳에서 치료받고 말끔히 나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반복되어 플레이되고 있었다. 그걸 보니 왠지 나도 금방이라도 나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1시간을 넘게 기다려서 만난 원장님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내 위를 만지자마자 심각한 상태라 위에 독소가 쌓인 채 굳어 위가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했다. 병명이 무엇이든 일단 무어라도 진단을 받았다는 것에 안심이 됐고 병원 로비에서 봤던 그 간증 동영상에 홀려 그곳에서 처방하는 대로 보험도 안 되는 비 약들짓고 물리치료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약을 먹지 않았어도 1년이나 음식을 조심하고 신경 썼다면 자연히 낫지 않았을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그 당시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고 그 약들과 치료는 내게 지푸라기 그 이상이었다. 적어도 플라세보 효과를 주기엔 충분했고 진짜로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큰 중병을 앓은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투병은 하찮은 에피소드 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인생 통틀어 그렇게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진 적 처음이었고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상상 이상의 두려움과 무력감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시간들을 겪으며 깨달은 놓아야 할 때 놓지 않으면 후에 더 큰 시련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의지가 아닌, 어쩔 수없이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련하게 굴지 않아야 한다. 3년 전의 나처럼 말이다. 아보면 '왜 그리 회사일에 목숨 걸고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었을까'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나와 가족이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함이지 내 몸을 희생해서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리고 겪어 보니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만 돌아간다. 휴직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내가 없어선 안 될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속이 불편한 날이면  다시금 그때의 교훈을 아로새긴다.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우쳐줬던 그 고통스러운 순간은 내 인생의 중요한 wake-up call이 되었다.


 오늘은 소박하게 끓인 밥이나 먹으며 속을 좀 달래줘야겠다. 내 몸을 지킬 사람은 국 나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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