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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Sep 06. 2021

회사원의 치트키

 오랜만에 혼자 비행기를 타니 몇 년 전 임원을 모시고 출장길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우리와 일을 하는 국제기구 본부에 가서 한국팀을 대표해 주어진 안건을 발표해야 하는 임무가 내게 맡겨졌다. 이직 후 처음으로 임원 앞에서 나의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테스트이자 한 편으론 기회이기도 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눈 붙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발표자료를 봤던 기억이 난다. 호텔에 도착해서도 시차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 몇 번이고 반복해서 발표 연습을 했다.  연습에 힘입어 다른 국가의 사무국 발표들보다 더 큰 박수와 관심을 받았고 동행한 임원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다.


 회사원에게 프레젠테이션이란 치트키 같은 거다. 물론 업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발표만 잘한다고 인정해주진 않는다. 하지만 발표를 잘하면 일도 잘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일을 따와야 하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면 발표와 업무 성과가 어느 정도 일치할 확률이 높고 외부에서 보기에 발표를 잘하는 사람은 업무 능력도 좋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난 프레젠테이션을 배워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음악을 했으니 나의 발표는 항상 연주가 대신했었다. 그러다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엄청나게 큰 규모의 회의를 유치하기 위한 중요한 PT가 잡혔다. 사원증에 잉크도 안 마른 나는 담당이라는 이유로 그 업무에 바로 투입됐고 거의 멘붕 직전이었다.

그때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법,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비법 등을 찾고 정리해서 발표할 자료에 대입시키고 무작정 따라 하며 연습했다. 크립트를 달달 외우다 못해 툭 치면 나올 정도로 주야장천 연습을 하면서도 맞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했었다.


 대망의 발표날.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셨고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의 유명 교수님들도 자리한 회의실. 포디움 옆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내 심장소리가 밖에 들리다 못해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침도 삼키지 못했다. 이러다 정말 실신하는 건 아닐까 심히 우려될 정도였다.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고 나를 소개하는 멘트에 앞으로 나간 나는 연습한 대로 한놈만(?) 패기로 했다. 가장 상석에 앉은 그날의 중요한 손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 먼 곳까지 오신 것에 대한 공치사로 발표를 시작했다. 일단 입이 열리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긴장이 사그라들며 심장소리가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웃으며 농담을 할 여유가 생겼을 무렵 발표는 마무리됐고 그 손님은 기립박수로 내 발표에 화답해주셨다. 덩달 옆에 있던 교수님들도 목소리가 좀 작았지만 내용은 훌륭했다며 칭찬을 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몰라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 나의 첫 경험이다. 그날의 작지만 소중했던 성공적인 발표 경험을 바탕으로 그 후 발표에 대한 막무가내식 공포에서는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나를 무대 공포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무한한 연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능하다면 발표할 장소에 직접 가서 할 수 있을 때까지 리허설을 한다. 그렇게 해서 그 장소와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긴장을 떨쳐내고 해야 할 말을 제대로 끝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 발표자는 무대 위 가수나 연기자와 같은 퍼포머다. 자연스럽지만 의도된 언어 선택과 표정, 제스처, 이 모든 것으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과 깨달음을 거쳐 난 단상 위 새로운 자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번 발표 때마다 그 자아와 조우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그 자아는 할 수 있는 연기와 퍼포먼스를 매번 최상의 퀄리티로 뽑아내기 위해 그 자아는 매번 연습에 올인한다.


 그 후로 1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단상 위가 완벽하게 익숙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없앨 방법을 알고 있는 데다 이젠 뱃속에 나비가 들어있는 듯한 울렁거림을 조금은 즐길 여유도 찾았으니 회사원 밥이 그저 멍텅구리 같은 세월은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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