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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Feb 03. 2022

사직서가 봉인 해제한 것은

  휴가를 반납하고 갑작스레 잡힌 회의에 참석하고 오는 길. 생각해보니 굳이 다음 주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나 싶다. 사표를 꼭 월요일에 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며칠 더 지난다고 내 마음이 달라질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핸드폰으로 단어들을 꾹꾹 눌러 담아 메일을 쓴다. 예의상 일언반구 없이 무턱대고 사직서를 던질 수는 없으니 팀장에게 메일로 구구절절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알렸다. 역시나 돌아오는 건 부재중을 알리는 회신. 그래도 일단 난 메일을 보냈으니 내가 할 도리는 다 한 걸로 치자.


 퇴사를 목전에 두니 지난 6개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8개월의 휴직을 끝으로 합격 소식을 듣고 온 몸에 전율이 올 정도로 흥분되었던 순간. 그리고 그 후 2주간 정식 오퍼 메일이 오지 않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안절부절 못 했던 기억. 내부 사정으로 두 번이나 미뤄진 입사일에 희비가 엇갈렸던 시간들. 그러나 드디어 닥친 입사일엔 그간 신경을 너무 쓴 탓인지 타들어가는 것 같은 위장병으로 거의 초주검의 상태였다. 회사가 아니라 사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아팠지만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렇게 망칠 수는 없다'며 '하루만 버티자'라고 이를 악물고 그나마 먹을 수 있던 누룽지 한 그릇으로 종일 버티던 그날이 생생하다. 눈을 뜨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던 그 순간에도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웃음을 머금고 처음 만난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었었다. 그 후로도 근 몇 주를 아팠지만 아무도 내가 그 정도로 아팠다는 걸 몰랐다고 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독하다. 그러나 내 몸이 그걸 그냥 넘어가 줄리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 몸을 이끌고 왕복 4시간이 넘는 출퇴근을 하며 몸무게는 5킬로 가까이 빠졌고 회사에서 당하는 정신적인 괴롭힘에 드디어 호르몬 교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나날이 피골이 상접하는 내 몰골이 못 봐줄 지경이었다.


 입사한 지 2주 만에 담당이라는 이유로 남이 작성한 자료를 중요한 회의에서 발표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아직 몸이 회복이 안되어 안 그래도 기관지가 약한 내 성대는 쉽게 갈라졌고 속 모르는 반바지는(본부장) 목소리가 왜 이리 자신이 없고 그 모양이냐며 인신공격을 해댔다. 그리고 급기야 오후 내내 팀장과 부장급들을 모아놓고 하루 종일 발표 리허설을 시켰다. 국제회의 유치를 하며 세계 곳곳에 나가 발표를 했던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마저도 그냥 꾹 참고 넘겼다. 내가 S대를 안 나와서 S대 인맥을 활용할 수 없으니 그만큼 다른 걸로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반바지(본부장)의 인신공격에 내 귀를 의심했지만 역시 현실이었고 일주일 된 신참인 내게 신의 기대에 못 미친다며 이렇게 불만이 계속 쌓이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자신이 멋대로 정한 골프 약속을 시아버님 기일이라 참석 못한다고 하자 왜 미리 얘기를 안했냐며 신경질을 부렸고 그 약속이 꼭 골프를 치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일부러 잡은 약속인 양 죄인을 만들었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도대체 어떻게 6개월을 버텼지?' 스스로 신기할 따름이다. 어느 날 이 이야기를 전부 들은 지인이 말했다. 나의 참을성의 한도가 너무 높다고... 왜 그걸 참고 있냐고. 하지만 난 안다. 내가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 상황이 내 잘못이 아님을, 실패가 아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리고 무리 이런 사람이 상사라도 일이 좋았다면, 아니면 적어도 배울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난 분명 더 참고 버텼을 것이다. 사람 때문에 그만둔다면 이 세상에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걸 알만큼 난 오래 일을 해왔다. 허나 이곳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사람도, 업무도, 그 어느  하나 남아있지 않다.


 표를 던지면 가분할 것 같았는데 마음에 이상한 광풍이 분다.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럽다. 심장이 빨리 뛰고 심지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버리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다. 일주일은커녕 단 하루도 이곳을 못 견딜 것 같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용변을 꾹 참다가 화장실이 눈앞에 보이면 갑자기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이제 이 시련의 끝이 보인다 생각하니 어서 이 사원증을 벗어던져버리고 싶어 조바심이 난다. 그와 함께 이유 모를 울컥함이 밀려온다. 그간 내 마음속 어딘가에 조금씩 찔러 감춰두었던 감정들이 용암이 분출하듯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외면하고 싶던, 모른 척하고 싶던, 아닌 척하고 싶던 그 감정들이 드디어 탈출할 구멍을 찾았다는 듯 쏟아져 나온다.


모르는 척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감정이란 건.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들이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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