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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Jan 30. 2022

한계를 마주하다.

이렇게 결국 해를 넘겼다.


 3개월의 수습은 회사가 나를 평가하는 시간임과 동시에 나도 이 회사가 나와 맞는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잘 넘긴는 건 함께 장거리 여행을 시작하겠다는 언의 약속이 체결되는 것과 같다. 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더욱더 확고해 뿐이다.


 오늘은 아침일찍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반바지(본부장)와의 외근이 예정되어 있다. ㅇㅇ배송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한 기업의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업무 성격상 기업의 CEO를 만나는 일이 잦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이 처음엔 신기했지만 그들 중 몇몇의 눈살 찌푸려지는 대장놀이와 동의할 수 없는 잘못된 신념을 접하면서 장님들에 대한  깨진 지 오래다.


 강남 한 복판에 우뚝 선 사무실에서 한 시간여의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 반바지가 차를 한 잔 하잔다. 나는 똥 씹은 표정으로 뜨거운 차 위에 둥둥 뜬 한라봉 과육들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벌써부터 내 마음은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굳은 얼굴로 입을 뗀 그는 만 4개월이 넘었는데 그간 어땠냐며 묻는다. 그러자 매일 속으로만 수없이 되뇌었던 회한 섞인 서러움이  쓸새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다. 내가 왜 이곳을 선택해서 왔는지, 무엇을 기대했고 그 기대가 어떻게 처절하게 무너졌는지 반바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날카로운 말로 그에게 속사포처럼 화살을 퍼부었다. 그는 갑자기 쏟아진 포화에 흠칫 놀라며 가늘게 실눈을 치켜뜬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것이라는 전근대적인 꼰대 감성으로 몇 주 동안 재택근무를 강행했던 내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려던 그는, 오히려 꼭 준비했던 것처럼 요모조모 따져가며 자신을 비난하는 내게 크게 당황한 기색이다. 게다가 그는 태생적으로 강약약강이다. 거칠 것 없이  모습을 보이자 역시나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 그습이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론  비겁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을 끝까지 피하지 않고 버티자 슬며시 먼저 눈을 피하는 그에게 약간의 쾌감도 느낀다. 길 가다 만난 성난개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피하지 말고 끝까지 눈으로 개를 제압해야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조언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점심 선약을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뜨는 반바지 덕분에 30여 분간 이어진 불편한 대치는 가까스로 끝이 다. '그런데 뭐지 이 홀가분한 기분은?'


 물론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다. 설 휴가기간에 갑자기 잡힌 미팅에 자기 대신 참석하라는 그의 어이없는  싫다는 말도 못 했고, 내가 처한 어려움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구태의연한 변명만 반복해서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속에 응어리져있던 말들을 전부 토해내 버리고 그로 인해 당황한 그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승리의 희가 나를 감싼다.

 

 지난주엔 팀장과 면담을 하며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다고 덤덤히 털어놓았었다. 그만두더라도 여름까지만 기다려 달라며 잦은 팀원들의 퇴사로 축 처진 그의 어깨에 측은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각자 인생이 품고 있는 타이밍이 다른 걸 어떡하리. 이곳에서 숨을 쉬는 순간마다 불행이 커져만 가는데 무엇을 기대하며 여기에 더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제 서서히 끝이 보인다. 내 한계가 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저 둘과의 의도치 않았던 면담을 끝으로 외려 내 마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더불어 내 확신의 정도가 얼마만큼인지도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무탈하게 이곳을 떠나는 일이다. 큰 분쟁 없이 소요를 일으키지 않고 처음 왔을 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흔적 없이 사라져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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