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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Feb 09. 2022

언제 깰지 아는 악몽은 무섭지 않다.

 요즘엔 그냥 눈물이 자주 난다.

우리 딸은 평소에도 눈물이 많아 티브이에서 누가 울면 어김없이 따라 우는 나를 매번 빼먹지 않고 놀린다. 그런데 요새는 꼬박꼬박 챙겨 놀리기에는 그 횟수가 너무 잦아 그러려니 하게 된 모양이다. '또야?' 하고 시큰둥하게 지나쳐간다. 물샘이 고장 났나 싶을 정도로 회사에서도 자주 울컥하는  감정의 기복에 하루가 출렁거린다.


 그러다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할 자리에서마저 마음이 출렁거리자 심히 당황스럽다. 그만두겠다는 날 붙잡겠다고 반바지(본부장)와 팀장이 급하게 마련한 저녁 식사. 고급 한정식을 눈앞에 두고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시간. '이런 불편한 자리를 왜 만들었을까.' 입술을 깨물며 차오르는 눈물을 꾹 눌러보지만 서러웠던 순간들이 떠올라 자꾸만 목이 멘다. 냉정하고 당당하게 쿨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든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난 태생적으로 그런 쿨함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꾸역꾸역 음식을 쑤셔 넣으며 튀어나오려는 감정들을 겨우 막아본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사직하겠다는 내 생각에 변함이 없냐고 재차 묻던 반바지는 예상보다 큰 소동 없이 긍하는 눈치다. 그런 그의 반응이 반가우면서도 뒤끝이 개운치 않다. 내가 무언가 놓치는 건 없는지 이러다 또 뒤통수 맞는 건 아닌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저 이번 기회에 하고 싶던 말 다 해버리자 싶어 떨리는 목소리로 '어려웠다고, 괴로웠다고,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그리고 당신한테 상처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막상 뱉어놓고 보니 타 부서와의 갈등과 해결이 불가능한 구조적인 한계, 그로 인해 금껏 받지 못한 인수인계. 미묘한 따돌림, 거기에 한몫 거드는 꼰대 상사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던 지난 시간이 이렇게 몇 개 단어로 축약되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겪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만 해도 지구를 한 바퀴 돌 정도인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고작 이거라니.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또 가늘게 실눈을 치켜뜨고 날 빤히 쳐다본다.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겠나 싶지만 곧 고개를 떨구고 '말해줘서 고맙다'는 그가 웬일로 조금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좋은 마무리를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건만 어쩌다 보니 난 타 부서원들한테 집단 따돌림을 당해 못 견디고 나가는 불쌍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고 그는 이를 막아주기는 커녕 뭣도 모르고 닦달하기만 했던 후회막심한 상사가 되어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듯한 그의 말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굳이 얼굴 붉히고 헤어질 필요 뭐 있겠나' 하며 갈등을 회피하고자 하는 내 본성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2주만 견디.'

이곳에 있는 순간순간이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악몽이었다. 하지만 언제 깰지 아는 악몽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마지막 근무일 저녁까지 회의를 주관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바쁜 만큼 쏜살같이 지나갈 시간에 마음을 기댈 수 있어 한편으론 잘 된 거라 여기게 된다.


 벌써 소문을 들은 팀원들이 하나둘 내게 말을 건넨다. "차장님... 비보 들었어요.", "저만 두고 가시는 거예요?", "그동안 맘고생 많았어요",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 "그렇게 많이 힘든지 몰랐어요. 도움 주지 못해 미안해요."  내 상황을 알고 있던 가까운 이들은 쉽게 납득을 하면서 안타까워하고 몰랐던 이들은 놀라워하며 제각기 다른 반응들로 내게 말을 건넨다.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인 헤어짐에 무뎌질 법도 한 팀원들 이건만 진심으로 서운해하며 나의 새로운 출발에 행운을 빌어주는 그들이 참 고맙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괴로웠던 건 사실이지만 후회스럽지 않은 이유는 온전히 그들 덕분이다. 오래도록 이어가고픈 인연들을 만났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6개월이 필요했다면 그리 나쁜 딜은 아니었다.


 이제 눈물 그만 멈추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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