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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Feb 14. 2022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사직하겠다는 내 이메일을 받자마자 반바지(본부장)는 역시나 득달같이 전화를 했다. 다시 생각해달라고 화를 냈다가 사정을 했다가를 반복하며 당황한 반바지(본부장)의 목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다. 전화기를 뚫고 나오는 그의 큰 목청에 질세라 나도 소리 높여 반복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이미 마음이 완전히 떠났고 돌이키기엔 늦었습니다.' 현실에서 내가 이런 말을 반바지 귀에 쑤셔 넣고 있다니!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순간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쭈뼛 들고 일어서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직서를 냈더니 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난데없이 사과를 한다. 난 또 그 미안하다는 말에 물색없이 음이 풀린다. 그간 내가 인사를 하면 똥 씹은 표정으로 외면하던 옆팀의 팀장이 날 불러 한참을 하더니 결국 미안하단다. '어른으로서 선배로서 그러면 안 됐었다며 미안하다'라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사과를 한다. 리고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팀에 와서 함께 일하자며 손을 내민다. 애타게 쳐다봐주길 바랄 때는 외면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그래도 덕분에 상처받아 구겨진 마음으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있게 되다. 트라우마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었을 시간이 점점 6개월짜리 에피소드가 되어가는 중이다.  주변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손잡아 주길 주저하던 사람들도 뒤늦게 손을 내민다. 인사팀에서는 타 부서의 다른 자리로 옮기는 건 어떠냐며 굳게 마음먹은 나를 흔들어 댄다. 하지만 그 말에 잠시라도 현혹되기엔 난 이미 마음으로 이곳을 버린 지 오래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쉬운걸 왜 들은 지금껏 안 하고 있었던 걸까. 허탈한 심정이다. '조금만 더 일찍 손 내밀걸, 조금만 더 일찍 얘기할걸...' 하며 후회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겐 어쩐지 위선처럼 느껴진다. 자신들도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 하나 남기려는 것일까. 어쩌면 이들 속에 있던 시간이 나도 비뚤어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의 매개는 언제나 정확한 타이밍이다. 결혼도 그랬고 직장도 그랬다. 준비되어 있을 때 나를 위한 사람, 나를 위한 자리가 찾아오면 그 타이밍에 맞춰 모든 거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타이밍은 처음부터 엉망이었다. 다른 곳으로의 입사를 확정한 상태에서 뒤늦게 찾아왔던 기회, 하필 온몸이 엉망진창으로 아플 때 맞이한 입사 첫날, 앙숙이었던 두 팀에서 서로 뺏으려 불화가 극에 달했던 순간 바로 그 포지션에 뽑힌 불운아가 나였다. 그런데 끝날 때까지 이 엇박자를 내는 타이밍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마음의 강을 건넌 내게 잘못했으니 돌아오라 손짓하는 이들의 어이없는 뒷북에 너털웃음이 난다. 이로써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얼굴이 좋아졌다며 인사를 한다. 아무래도 홀가분한 이 마음이 숨겨지지 않나 보다. 이제 핸드폰에 뜬 반바지(본부장) 이름에 심장이 벌렁거리지 않아도 되고 옆 팀에 가서 주지 않는 자료를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 일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의지했던 사람들이 나를 따돌리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채고 상처받지 않아도 되고 인턴이나 할 법한 일을 맡아하며 자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살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한 문장으로 껄끄럽지 않게 이 기억을 소환해내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의 더께가 쌓여야 할 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북이라도 요란하게 울려주는 이들 덕분에 내 마음 한구석에 묘한 평화가 깃든다. 내가 전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는 점에서 헤집어진 상처부위를 조금은 봉합할 기회가 생긴 듯하다. 갑자기 쏟아지는 따뜻한 관심 세례가 많이 낯설지만 이 싫지 않은 낯섦을 만끽할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와중에 반바지(본부장)는 내 후임이 될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상부에 보고하겠다며 옆 팀의 비협조적인 행태를 시시콜콜 정리해서 달란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사람을 뽑겠다며 욕심을 내는 그가 참 어이없고 그 모든 화살을 옆 팀에게 돌리는 것 또한 답이 없다. 본인이 해결했어야 할 일을 나에게 미루며 본인의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던 자신의 과오는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나 보다. 그처럼 딱히 똑똑하지도 않고 리더십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 어떻게  자리까지 올랐는지 이제야 알 것 같.

 다시 희생자를 만들겠다는 그를 내가 무슨 수로 말리겠냐만 적어도 이 자리에 새사람이 왔을 때 나의 경우를 교훈 삼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곳에서의 나의 사투가 그 정도의 작은 변화만이라도 일 준다면 나는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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