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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Feb 18. 2022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제 딱 하루 남았다.

마지막 날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본다. 퇴근 직전까지 화상회의를 주최해야 하고 그날이 데드라인인 중요한 자료도 책임지고 본사에 제출해야 한다. 이걸 굳이 내가 해야 하나 싶지만 월급 받는 날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군말 않고 기로 했다. 업무 관련해서는 애초에 인수받은 것이 없으니 인계할 것도 딱히 없다. 내가 하던 일들을 폴더별로 정리해서 팀 공유폴더에 넣어놓으니 그걸로 끝이다. 1년이 안되었으니 퇴직금을 받을 일도 없고 소진할 연차도 없어 마무리가 아주 단순하다. 회의가 끝난 뒤 노트북을 반납하면 이제 정말로 끝이다. 이 6개월간의 경력을 이력서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아주 잠깐 고민을 해다. 공백기로 놔두기엔 긴 시간이고 경력으로 넣기엔 택도 없이 짧은 6개월. 그 짧은 6개월이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이 동네가 싫어질 만큼.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물렁해지려는 순간, 역시 이 회사는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사과라고 생각했던 옆 팀 팀장의 말은 날 그만두게 만든 원인으로 지목되지 않기 위한 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는 잘 짜인 각본대로 그 쇼와 함께 발 빠르게 이번 사단의 주역으로 본인 대신 반바지(본부장)를 지목했고 결국 그는 7년이 넘도록 애정을 쏟던 보직을 내려놓게 됐다. 굳이 따지자면 내 퇴사의 50% 지분을 갖고 있는 그는 나머지 50%의 지분을 가진 상대편과의 싸움에서 밀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일을 잃은 것이다. 화상통화로 한 시간이 넘도록 날 붙들고 하소연하는 반바지를 난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평소대로라면 내 공감 버튼이 자연스레 눌려 마음이 아픈 것이 정상이지만 그에겐 이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다. 나의 퇴사가 그까지 끄집어 내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조금 당황스럽긴 하나 미안하지는 않다. 인사팀과의 퇴사 면담에서 내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가 아주 잠깐 측은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계략, 이간질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보니 지금이라도 여기에서 빠져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안도가 찾아온다. 몸과 마음이 피곤한 이곳이 어서 잊힌 과거가 되면 좋겠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계속 연락을 해온다. 몇 개월 안 되는 시간 동안 내가 이리도 많은 사람을 만났던가. 재택근무로 출근했던 날 꼽으면 100일이 채 안될 텐데 고작 한두 번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한다. 잠깐 이었지만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안타까움을 느꼈고 그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고자 했던 나의 순수한 용기에 공감했다는 사람들. 진심으로 내 앞길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함께했던 이 시간을 이력서에 그대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약간의 흠이 있는 이력서가 되겠지만 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며 나를 속이는 것보다는 솔직히 내보이고 그 흠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나 다운 일임을 안다. 이렇게 다시 나다움을 찾을 시간이 왔다. 내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내쳐지던 시간. 자괴감으로 잠 못 이루고 끝을 모르고 땅 파고 내려가던 내 자존감.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끌어모아 바로 세우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더불어 성장하는 것이 모토인, 일을 대하는 나의 신념을 다시금 되새길 때가 왔다.


 퇴사 면담에서 내가 몇 번이고 부르짖던 말이 떠오른다.

"전 그저 일이 하고 싶었어요. 동료들과 즐겁게 성취감을 느끼며 그냥 일이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불혹에 맞이한 이 역경 앞에 불혹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심한 마음의 동요를 겪었다. 허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분명 교훈을 남긴다. 지난 6개월이 내게 남긴 것은 '역경은 바로 마주하여 싸워 이겨야 할 때도 있지만 너무 심한 피해가 예상될 때는 피해 가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일 수 있다'라는 것이다. 나의 상황을 모르는 이는 경력이 몇 년인데 적응 못하고 포기하냐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자존심 상하지 않냐고 도발하는 사람, 어떻게 옮긴 자리인데 1년도 안 해보고 포기하냐고 무책임하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마주하면 자존심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건강과 행복이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그렇게 힘든데 자꾸만 외면하려 해서 미안해. 이제 아프지 말고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곳에서 웃으며 일하자.'

 세상에 등 따숩고 배부르고 마음 편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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