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12시간이 넘는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로마에 입성했다. 짐을 찾고 나가보니 NCC ROMA에서 배정된 택시기사가 내 이름을 적은 자그마한 종이를 들고 Limo Service 기둥 옆에 찰싹 붙어 서 있다. 약 30분간의 도착 지연과 지난했던 이민국 통과를 위한 기다림 그리고 3개의 캐리어를 찾고 나오는 데 걸린 시간만 한 시간이 넘으니 꽤 피곤한 얼굴의 택시기사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 택시에 우리 가족 말고 다른 예약자가 있어서 그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에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느 블로그를 통해 합승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딱히 불쾌하지도,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출발한 지 30분 만에 숙소 도착. 아저씨에게 약속된 비용만큼의 현금을 건네며 '혹시라도 억지를 부리며 추가금을 내라고 하면 강하게 대응해야지' 라며 비장한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려 손수 짐도 내려준다. 좋은 시간 보내라며 인사하는 친절한 아저씨를 의심한 것이 미안해 "그라찌에 밀레- Grazie Mille!",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크게 소리친 뒤 웃으며 아저씨를 보내드렸다. 그렇게 숙소 문 앞에 서니 벌써 밤 9시가 다된 시각. 하지만 한 여름의 로마는 아직도 대낮이다.
난 꼼꼼하다 못해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스스로 자처할 만큼 디테일에 신경을 쓴다. 내가 계획한 것들에 변수가 생기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어비앤비 숙소 체크인 과정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사전에 미리 체크했었다. 구글맵으로 지도에 나온 주소의 대문을 찍어 호스트에게 보내 그 집이 맞는지 확인했고, 셀프 체크인이라며 가르쳐 준 모든 순서를 내가 이해한 대로 다시 적어 호스트에게 재 확인을 요청했더랬다. 그런데 왜! 우린 15분째 이 집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집 문에 열쇠를 꽂고 돌리니 몇 바퀴씩 잘도 돌아간다. 게다가 문이 열린 듯 딸깍 소리가 나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고 어서 시원한 숙소에서 몸을 뉘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우리 아이는 짜증이 나다 못해 절망스러운 얼굴이다. 결국 What's App으로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호스트는 단호하게 그럴 리가 없단다. 몇 시간 전에 퇴실한 사람이 그 열쇠를 잘만 썼단다. 결국 영상 통화를 걸어 전 과정을 다 보여주니 미안하다 하면서도 계속 시도해 보라는 말뿐 딱히 뾰족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세 식구가 달라붙어 문에 붙어 있는 모든 자물쇠와 한참을 힘겨룸한 끝에 언제 그랬냐는 듯 육중했던 문이 스윽 열린다.
그래 여행이란 건 변수의 연속이지. 내가 아무리 완벽하려 해도 낯선 환경을 제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는다.
로마에서 맞는 첫 아침. 새벽 5시.
한국시간으로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셈이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오늘 예정된 공식 일정은 야경투어 하나다. 그렇다고 저녁까지 숙소에서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카푸치노와 이탈리아식 크로와상, 크로네트를 먹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아침 10시임에도 찌는 듯한 햇살은 양산을 뚫어 재낄 듯 뜨겁다. 로마에서의 첫 카푸치노와 크로와상을 먹으니 비로소 로마에 온 것이 실감 난다.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커피의 본고장에서 먹는 카푸치노는 왠지 모르게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아이는 피스타치오 크림이 얹힌 크로와상이 맛있다며 방금 짜낸 오렌지 주스와 함께 흡입 중이다. 아이에게 이탈리아의 첫 이미지는 아마도 맛있는 크로와상일 듯싶다.
야경투어를 위한 집합시간은 오후 7시 반이다.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성 마조레 대성당 앞 분수에 나가니 벌써 함께할 관광객들이 꽤 모여있다. 다행히도 오늘은 아주 많이 덥지는 않을 모양이다. 감사하게도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아직 장거리 비행과 덜 된 시차적응으로 컨디션이 바닥이지만 있는 힘을 쥐어 짜내어 가이드님을 놓칠세라 뒤를 바짝 쫓아본다.
야경투어는 성 마조레 성당을 시작으로 콜로세움, 베네치아광장, 천사의 성, 판테온, 나보나 광장을 거쳐 트레비 분수 앞에서 끝마치게 된다. 로마의 주요 관광지를 가이드님의 설명을 들으며 걷게 되는데 로마 자체가 그리 큰 도시가 아니라서 꽤 걸을 만하다. 게다가 오디오가 비지 않도록 계속해서 가이드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없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가이드님의 말솜씨와 지식의 차이가 이 투어의 질을 결정하게 될 것 같다.
오전에 나와 트레비 분수를 미리 다녀온 아이는 잠실 롯데백화점에서도 본 거라며 심드렁해하던 그때와 달리 가이드님의 이야기에 꽤 집중하는 듯 보인다. 피자의 본고장이라는 것 말고는 이탈리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처음 듣는 역사 이야기와 신화들에 흥미를 보인다. 책에서 봤다면 흘려 읽었을 내용들이지만 눈앞에 직접 실존하는 건물을 보며 귀로 듣는 이야기는 확실히 아이에게 닿는 깊이가 다르다.
그렇게 장장 3시간을 걸으며 집중하다 보니 체력이 완전히 방전됨이 느껴진다. 온몸이 뻐근하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더 이상 사진을 위한 포즈도 취하고 싶지가 않다.
로마에는 3대 철인 투어가 있다. 바로 시내투어와 바티칸투어, 그리고 로마에서 출발하는 이탈리아 남부투어다. 이 세 투어는 하루라도 간격을 두고 참여하는 걸 권하고 싶다. 정말 철인 같은 체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도 멋진 야경을 배경으로 평생 남을 사진을 갖게 되니 정말 뿌듯하다. 우리 가족이 언제 또 이렇게 함께 이곳에 올 수 있을까? 16년 전 영국유학을 마치고 졸업 기념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로마에 왔었다. 우리 아이도 어른이 되면 우리 가족에게도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을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부담은 주고 싶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