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이탈리아 일주 EP03

이탈리아 중부 여행, 발도르차, 몬탈치노, 치비따디바뇨, 피엔자

by 지오바니

바티칸 투어라는 큰 산을 넘었더니 이미 로마 여행의 절반은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여행 3일 차라는 것. 로마에서만 일주일을 묵고 귀국해야 하는 꼼군을 위해 로마에 있는 동안 중부와 남부 투어를 해보기로 했다. 두 개의 투어 모두 인 당 15만 원에서 20만 원까지 드는 투어라 세 명이 되면 두 개 투어만 해도 100만 원이 넘는다.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더운 날씨에 지치지 않고 다양한 지역을 하루에 다 볼 수 있으려면 투어밖에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


아침 6시 10분. 집합 장소인 테르미니 역 근처 호텔 갈레스 앞으로 가니 회색 봉고차 한 대가 기다린다. 성수기지만 로마에서 중부투어까지 소화하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은가 보다. 우리 가족 외에 두 명으로 이루어진 다른 한 팀만이 이번 투어의 동행이다. 시원한 에어컨이 틀어진 차 안에서 가이드님이 운전해 주시는 차를 타고 출발. 오늘 가 볼 곳들은 기차를 타고 개인적으로 방문했다면 하루에 다 볼 엄두도 내지 못할 거리와 장소들이다. 이틀간 강행군에 지친 아이도 시원한 차 안에서 투어 장소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오래간만에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번 투어는 관광객으로 빽빽한 로마를 떠나 말 그대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탈리아의 소규모 도시를 방문하는 힐링에 가까운 프로그램이다. 가이드님도 운전에 집중해야 하니 로마의 다른 투어처럼 쉴 새 없이 오디오를 채워 넣지 않으신다. 덕분에 일행들 모두 부족한 잠을 채우거나 한가로운 이탈리아의 창밖 풍경을 보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긴다. 아이는 이미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고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에 괴로워하던 꼼군도 오늘은 제법 편안해 보인다.


한 시간 반을 달려 처음 도착한 곳은 '천공의 섬, 라퓨타'라는 애니메이션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중세 도시, 비치따 디 바뇨이다. 그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없지만 현재 오직 4 가구만 살고 있다는 그 도시를 바라보니 왜 저 도시가 애니메이션의 모티브가 되었을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하늘에 떠 있는 듯 절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마을이 저 햇살 아래 뚜렷이 보인다. 해발 1500미터에 우뚝 솟아 있는 비치따 디 바뇨는 그 주변이 산사태로 무너지며 현재 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11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어 도시와 인근 마을을 잇는 다리가 놓아졌고 주민들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저 다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간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려는데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높이에 놓인 다리 위로 트랙터 크기의 쓰레기 차가 계속 지나간다. 우리 옆을 스치듯 지나갈 때면 난간에 바짝 붙어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야 한다. 어디서도 해보지 못할 생경한 경험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마을로 들어가 한적한 마을 골목을 돌며 열심히 사진을 찍고 기념품 샵에 들러 엽서 한 장을 샀다. 내 살아생전 여기를 또 올까 싶어 포토 엽서로라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다.

그다음 목적지는 몬탈치노. 일명 BDM(Brunello di Montalcino)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유명 와인 산지이다. 아쉽게도 술을 잘 못하는 나는 거리의 모든 가게마다 붙여진 '와인 시음 중'이라는 팻말을 그냥 지나쳐야 했다. 다행히 와인샵들만 가득한 거리에서 카페 하나를 가까스로 찾아냈다. 카페에 앉아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얼음이 들어간 커피, 샤케라또를 시켰다. 이탈리아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아이스커피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 다면 꼭 와인 한잔 시켜서 드셔보길. 나는 아쉽게도 커피 한잔과 동네 구경으로 몬탈치노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잠시 들른 '발도르차 평원'. 내가 애정하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의 집이 있던 그 평원이다. 멋들어지게 자란 싸이프러스 나무들 사이엔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이미 줄을 서 있다. 그들 틈에서 한껏 포즈를 취하며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고스란히 내 것으로 만든다. 가이드님 덕분에 셀카가 아닌 제대로 된 가족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어 더 의미 있던 시간이다. 이번 투어를 진행하신 가이드님도 역시 사진 장인이었다! 사진만 들이대면 뚱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도 밝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시선도 돌려보고 손도 올려보고 자유로워 보인다. 그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 함께 여행 온 것이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억하지 못할 더 어린 시절 말고, 부모님과 여행하는 것이 귀찮아질 몇 년 뒤 말고 바로 지금 아이와 이런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새벽 5시부터 부산을 떨었더니 12시가 되자 배에서 굉음이 들린다. 오늘 점심을 먹으러 들른 곳은 '피엔자'라는 마을이다. 올리비아 핫세가 주인공이었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은 장소가 바로 이곳에 있다. 내가 기억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버전이지만... 그 영화에서 줄리엣이 살던 집으로 나온 성당에 들어가 땀을 식혀본다. 이 투어가 아니었다면 이런 작은 이탈리아의 도시까지 와볼 수는 없었을 테니 나도 유럽인들처럼 여유로운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꽤 크다. 무더운 날씨지만 지중해성 기후로 습도가 낮아 그늘에만 들어가면 견딜만하다. 골목 한쪽에 자리한 돌 벤치에 앉아 삼삼오오 오가는 관광객들을 보며 로마와는 또 다른 평화로움을 한껏 만끽했다.

다시 로마로 향하는 2시간이 넘는 여정을 마지막으로 이번 투어는 끝이 났다. 관광객으로 그득한 로마를 잠시 벗어나 잠시나마 지친 심신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엄청난 역사적 유물이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는 없었지만 로마의 그 어떤 투어보다 여운이 많이 남는 프로그램이다. 그림 같았던 싸이프러스 나무가 가득한 평원과 하늘에 떠 있는 듯했던 중세의 도시. 그리고 식료품 봉지를 손에 들고 그 높은 다리를 덤덤하게 오가던 마을 사람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한국에서의 바쁜 도시에서의 삶에 지칠 때면 한 번씩 이 고즈넉한 풍경이 그리워질 것 같다.


https://myrealt.rip/XWE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