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탈리아 중부 투어 중반쯤부터 목덜미가 가렵다며 긁어대던 아이는 결국 밤새 몸 전체로 발진이 퍼져나갔다. 너무 더운 날씨에 땀이 잔뜩 난 아이가 땀띠가 난 것으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방치했던 결과다. 저녁에 약국에 들러 바르는 연고와 베이비파우더를 사서 씻기고 발라줬는데 아무 소용도 없이 밤새 아이는 온몸이 가렵다며 펑펑 울며 잠을 자지 못했다. 겁이 덜컥 난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약국으로 다시 달려갔다. 다행히 어제 연고를 구매했던 그 약사분이 나를 기억하신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먹는 약을 사서 바로 약을 먹였다. 하지만 크게 차도가 없다. 그저 온몸을 차가운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가려움을 좀 덜어주는 방법밖에는... 괴로워하는 아이를 보며 그저 참으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부모로서 정말 못할 짓이다.
저녁을 먹은 후 아이의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두드러기가 온몸에 벌겋게 부어오르고 아이는 속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호소한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주변 응급실을 검색했더니 주변에 약 3개의 큰 병원이 나온다. 그중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국립병원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탈리아는 공공 의료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어 의료 자체는 무료지만 대신에 아주 응급한 상황이 아니면 보통 3-4시간, 길면 7-8시간까지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라고 한다. 그 기다림에 지쳐 결국 치료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사실 그 이야기들 때문에 아이가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상태가 더 심각해질까 봐 낮부터 한참을 망설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말 그대로 응급사태다. 아이의 가려움과 고통이 최대치로 솟아오르고 도저히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버를 부르니 2분 만에 숙소 앞으로 달려온다. 걱정만 기대반으로 응급실로 달려 들어갔다. 역시나 대기실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접수하는 곳으로 달려가 간호사에게 아이를 보여줬다. 이미 얼굴과 목덜미 등 보이는 곳은 전부 벌겋게 부어 오른 아이가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을 보자 간호사는 응급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유럽에는 알레르기 환자들이 많고 보통 알레르기는 목이 부어오를 경우 치명적일 수 있다. 그렇게 간호사는 먼저 아이의 목부터 확인한 후 바로 접수를 시작했다. 바보같이 급한 마음에 지갑만 들고뛰었던 나는 접수를 위해 아이 여권을 달라고 하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꼼군에게 다시 숙소에 다녀오라고 말하려는 찰나, 다행히 여권을 찍어 놓은 사진으로도 접수를 해준다는 말에 그라찌에,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접수를 하는 사이 아이는 이미 침대에 눕혀져 어디론가 옮겨졌다. 우리는 잠시 대기실에서 기다리라는 말에 혼자 괴로워할 아이가 오랫동안 방치되면 어쩌나 싶어 걱정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결국 대기실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가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여행이고 뭐고 빨리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가야 하나, 하루동안 아이를 방치해서 너무 힘들게 했다는 자책감. 무지함에 가려움증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먹인 내 탓인 것 같아 너무 속이 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꼼군이 함께 있는 기간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점이다. 말도 안 통하는 이 타국에서 나 혼자 이 일을 감당해야 했다면 정신적으로 버텨낼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아마도 바로 한국 가는 비행기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분 후 서류 작업을 마친 간호사가 종이 하나를 건네준다. 여행자 보험에 들었냐고 묻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290유로(약 50만 원)쯤으로 작성된 이 서류를 보험사에 제출하면 된다고 한다. 외국인에게도 의료 서비스는 무료라고 들었는데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아이가 빨리 치료받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
의사가 올 때까지 수액을 먼저 놓겠단다. 아이는 가려움증에 몸부림치는데 항히스타민제를 놔주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의사가 내려와서 처방을 해야 한단다. 애간장이 끓는다. 그런데 몇 분 안 되어 영어를 할 수 있는 의사가 바로 내려왔다. 하루동안 아이가 먹었던 약을 가져와서 보여주고 언제부터 발현이 되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더니 바로 주사를 처방해 준다. 내가 먹였던 약이 아이 몸무게에 비해 용량이 적었다며 주사를 놨으니 상황을 지켜보자고 한다. 한두 시간쯤 더 걸릴 테니 아이 옆에 앉아서 기다리라며 의자까지 가져다준다. 내가 기대했던 최고의 시나리오다. 응급실인 만큼 응급한 순서대로 처리를 해주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게다가 아이인 만큼 우선적으로 치료해 주었던 것 같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약이 효과를 나타내자 어제부터 잠을 설쳤던 아이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잠이 와도 가려운 고통에 10분 이상 자지 못했던 아이가 평화로운 얼굴로 잠이 들자 그제야 온몸에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큰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꼼군과 마주 앉아 병원에 오길 정말 잘했다며 우리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밤새 아이를 재우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병원의자에 앉아 밤도 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2시간 여가 더 흐르자 아이의 몸에 있던 홍반들도 거의 사라지고 눈을 뜬 아이도 가려운 곳이 없다고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이 의료진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그저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정말 고맙습니다를 외쳤다. 의사는 피검사 결과와 진료 기록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상세히 설명해 주고 앞으로 먹어야 할 약도 처방해 주었다. 이렇게 병원에 도착한 지 약 3시간 만에 우리는 웃는 얼굴로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며칠은 더 약을 먹어야 하고 특히 먹는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잘만 관리한다면 아이에게 더 이상의 고통은 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당연히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했고 아이가 아플 수도 있다는 것도 예상했었다. 그래서 아이가 평소 자주 겪는 두통과 소화불량에 대비한 약도 챙겨 왔다. 그런데 변수란건 말 그대로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생긴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변수에 대비할 수는 없지만 잘 대응할 수 있다면 그 변수가 무서워 실행조차 못하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일을 통해 비록 수억만 리 타국이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란 것, 그러니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바로 '여행자 보험'은 필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