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에 도착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10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쌓인 여독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여전하다. 익숙한 일상이 기다리지 않는 내일이 이토록 두려운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부모님이 차려주신 밥을 먹고 빨아주신 옷을 입고 편안하게 정해진 루트대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당연했던 삶에서 단지 10시간을 날아왔을 뿐인데, 이 처음 느껴보는 막막함은 날 완벽히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 민박집은 분명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이상하게 일본인만 득실거린다. 한국인은 나와 선희가 유일하다. 처음 보는 일본인들과 방을 함께 써야 한다는 것도 불편한데 숫자에서 밀리는이 기분이 영 유쾌하지 않다. 알고 보니 인터넷에서 고르고 골라 선택한 이 한인민박은 일본인에게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물론일본사람이 많다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영국, 특히 런던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도시이니 앞으로다양한 문화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에익숙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오래 살다왔다는 민박집주인의 일본에 대한 사대주의 발언들은아주 가관이다. 한국과 일본을 자꾸 편가르는 듯한 그의 언사에 심기가 점점 불편해진다. 한국에선 아침식사에도 김치를 먹는다는 내 말에 아침부터 냄새 풍기면 어쩌냐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일본 학생들이 얼굴을 찌푸린다. 이에 크게 동조하며고개를 주억거리는 민박집주인의 얼굴에 고등학교 영어 선생 얼굴이 겹쳐져 떠올랐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왔던 그 여선생은 매번 수업 때마다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며 한국사람을 엄청 미개인 취급했었다. 마케팅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소유하거나 경험한 것에 대해 더 높은 가치를 매기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수준 높은 유학생들을 유치하려는 것도 크게 보면 그 나라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pro-USA, pro-Japan과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본인의 나라를 비하하는 건 정말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다.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줄도 모르는 배알도 없는 사람들.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자 방으로 돌아와 짐을 풀기로 했다. 남대문에서 구매한 삼단 접이식 이민 가방을 열어보니 가방 빈 곳마다 두루마리 휴지로 빈 틈이 없다. 엄마는 나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 살면 필요할 거라며 가방 빈구석이 없도록 온갖 것들을 한가득 채워 넣었었다.
"엄마! 거기도 사람 사는데야, 설마 두루마리 휴지 없을까 봐 그런 거를 넣어, 가방 무겁게!"
내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채우며 걱정으로 마음 졸였을 엄마 얼굴이 떠올라 한순간 먹먹해졌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언제나 응원해 준 엄마. 딸이 아무 연고도 없는 수억만 리 떨어진 곳으로 혼자 간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망설임 없이 "난 내 딸을 믿는다. 넌 어디서나 잘할 거야"라고 하며,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이 결정을 응원해 줬다. 말은 그렇게 쿨하게 하셨지만 이민 가방을 가득 채운 자잘한 살림살이들이 엄마의 노심초사를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이렇게 바리바리 싸준 생활용품들은 후에 살 집을 구하고도 한참을 마트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유용하게 잘 썼다.
밥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지만 저녁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이 곳에서 차마 먹을 걸 달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민박집주인은 앞서 묵고 있던 일본인 손님들과 삼겹살 파티 중이다. 삼겹살 기름에 잘 볶인 김치 냄새에 아는 냄새라는 듯 위장이 요동을 친다. 한국이라면 예의상 내게도 같이 먹자고 했을 법한 상황이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그 음식들을 쳐다보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지만 원초적인 욕구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먹는 걸로 치사하게 구니 기분이 확 상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국 떠나온 지 24시간이 채 안되었지만 내 위장은 본능적으로 삼겹살이란 음식이 한동안 먹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챈 듯 오늘따라 유난히도 큰 소리를 낸다. 배고픈 설움과 창피함 그리고 괜한 분노가 뒤섞여 기분이 아주 엉망이다. 하는 수 없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찍 잠을 청하기로 했다. 삐걱거리는 2층 침대의 어두컴컴한 아래쪽으로 몸을 겨우 집어넣었다. 아래층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위층 침대에서 뒤척거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도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단잠을 잘 듯하다. 얼른 집을 구해 이곳에서 탈출하겠다 다짐하며 런던에서의 첫 밤이 이렇게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