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혈단신 영국에서 살아남기(3)
런던에서 집 구하기
저녁 7시 반이지만 어둑어둑해진지는 벌써 오래다. 런던에 온 지 3일째, 아직 난 민박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난 3일간 이곳저곳 열심히 발품을 판 끝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산 안에서 가장 적절한 방을 찾았다는 뜻이다. 누군가와 공유해야 하는 트윈룸이지만 안전제일주의인 겁 많은 내가 만족할 만한 위치에 있는 곳이다.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어 어두운 골목길을 걷지 않아도 되는 2층짜리 쓰리베드룸 하우스다. '영국사랑'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방을 함께 쓸 한국인 룸메이트도 찾았다. 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 같은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방을 쓰는 것이 아무래도 몸과 마음이 편할 것은 자명한 일. 그리고 솔직히 아직은 서툰 영어실력으로 외국인 룸메와 동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1층 방은 집주인인 마이클이 쓴다. 덩치가 좋은 흑인 헬스트레이너인 마이클은 여분의 2층 방 두 개를 나 같은 외국인들에게 세를 놓고 있었다. 오랜 경험 덕분인지 말썽을 일으킬 확률이 적어 보이는 동양 여자들을 반겼다. 그때까지도 한국에서 흑인을 만나본 적이 없던 나는 처음엔 그의 까맣고 커다란 덩치에 조금 겁이 났다. 하지만 그 덩치와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유순한 얼굴을 하고 있어 괜한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내 방 옆방은 동유럽 출신 여자 둘이 살고 있는데 이 전 내 방에는 중국인이 살았다고 했다. 수다스러워 보이는 그 둘은 이곳에 살았던 중국 여성이 상하이에서 온 부잣집 딸내미였고 마이클에게 반해 지금도 가끔 스포츠카를 끌고 마이클을 찾아온다는 부연설명까지 해줬다. 중요한 건 마이클은 그녀가 찾아올 때마다 방안에 숨어 없는 척을 한다는 거다. 무슨 속사정이 있는진 모르지만 저 덩치에 불까지 끄고 숨어 있을 그를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못해 귀여울 지경이다.
이렇게 겁 많은 흑인 트레이너 집주인과 동유럽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살 이 집은 East Acton이라는 동네에 있다. 버스로 한두 정거장만 가면 그 유명한 BBC 방송국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런던 시내가 있는 Zone 1과 가까운 Zone 2여서 처음엔 꽤 좋은 동네인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유색인종 비율이 높은 가난한 동네다. 어두워지면 가급적 혼자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과 가깝고 정류장 바로 앞이라는 크나큰 장점에 이사를 결심했다.
오늘은 집을 구한 뒤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아침 산책을 했다. 11월 초의 런던은 한국처럼 기온이 낮지는 않지만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한 번씩 불 때마다 속살까지 찬바람이 스며들어 살을 에인다. 좀 더 두꺼운 옷을 가져왔어야 하나 후회하며 걷던 내 눈앞에 신호등 없는 건널목이 나타났다. 사람이 건널목 앞에 발을 딛기만 해도 양쪽으로 멈춰서는 차들이 마냥 신기했다. 손을 들고 건너지 않아도 사람이 최우선이라는 듯 어디서나 차들이 먼저 조심을 한다. 한국에선 파란 신호등에도 건널목까지 밀고 들어오는 차들을 조심하느라 신경 쓰였던 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문득 지금 아무도 날 모르는 장소에 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물론 한국이라고 모든 사람이 날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내 나이와 성별, 사회적 위치 등 사람들이 나를 구별하고 인식하는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박이 있다. 내가 지금 어떤 차림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타인이 날 어떻게 볼지 신경쓰며 사는 삶에 꽤 익숙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알지도, 나에게 어떤 기대도, 아무 관심도 없다는 사실이 스무 살 넘어 처음 느껴보는 자유함으로 다가왔다. 눈치 보지 않는 삶이라니... 내 눈앞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이 기분에 취해 있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그 자유함이란 자유를 가장한 외로움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또한 스스로 삶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성취하려는 책임감으로 노력 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나락으로 쉬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자유함과 무한한 책임감의 양가감정이 영국이 내게 선사한 첫 번째 교훈이자 경험이다.
숙소에 와보니 선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함께 마지막 저녁을 먹으려 기다리는 중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집을 구하러 나갔다. 성향이 많이 다른 우리는 애초부터 굳이 같이 방을 보러 다닐 시도도 하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의 그녀와 술이라곤 입에도 못 대는 샌님 같은 나는 그 편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 믿었다. 그래도 집을 떠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며칠간 꽤 의지했던 터라 내일이면 헤어질 생각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하지만 살 집을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편안해진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로써 이곳에서 해야 할 첫 번째 숙제를 잘 마친 셈이니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학교생활이 시작된다. 하루에 세 시간씩 영어수업을 듣고 남는 시간엔 아르바이트를 할 계획이다. 벌써 첫 달치 월세와 보증금으로 가져온 돈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는 절대로 빠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영어를 익힐 생각이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 큼의 성과를 가져갈 수 있을지는 결국 전부 나에게 달린 것이란 사실이 자꾸만 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제 겨우 3일째인데 벌써 엄마, 아빠 목소리가 너무 그립다. 동생이랑 우리 강아지도 너무 보고 싶다. 이 강아지 녀석이 과연 날 기억이나 해줄는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