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으러 파리 갈래?
2006년 겨울
항공사 직원의 가장 큰 베네핏은 역시 저렴한 항공권이다. 우리는 공짜 티켓은 없지만 대신 전 세계 어디든 세금만 내면 갈 수 있다. 한국도 왕복 20만 원이면 다녀올 수 있고 유럽의 항공권은 정말 저렴해서 매일 농담처럼 '우리 내일 파리에서 점심 먹을까?'라며 웃곤 한다. 물론 스탠바이 티켓이어서 빈 좌석이 있어야만 탈 수 있다. 그러나 항공예약 시스템을 통해 어떤 비행기 예약이 여유가 있는지 미리 볼 수 있는 덕분에 자리가 없어 낭패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 가지 불안한 건 기내식도 남아야만 먹을 수 있다는 거다! 한국행 비행기처럼 긴 비행에서 혹시나 굶을까 봐 걱정을 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한 번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시아나를 타는 날이면 아시아나 런던지사 담당자가 내 이름에 무슨 표시를 해놓은 건지, 매 시간 승무원분들이 와서 내가 괜찮은지 뭐 필요한 건 없는지 계속 묻는 통에 당황스럽다. 신경 써달라고 주문을 넣었던 건가... 그럴 때면 고마우면서도 은근히 좌불안석이다.
그러나 예약이 차고 넘치는 성수기에 스탠바이 티켓은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그럴 땐 그냥 저비용 항공사를 탄다. 워낙 저렴해서 세금이랑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엔 라이언 에어를 타고 로마에 다녀왔다. 처음 타본 저비용 항공사는 체크인 짐을 실으려면 돈을 내야 하고 기내 서비스도 거의 없었다. 하늘을 나는 2시간 반짜리 좌석버스를 탄 기분이랄까. 나라들이 다닥다닥 이웃하고 있는 유럽에 산다는 것이 이런 건가 싶다.
버스 같은 비행기라니...
유니폼을 입는 직업을 한 번도 동경한 적이 없건만 막상 그런 매일 소속감을 드러내는 옷을 입게 되니 몸가짐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물론 맥도널드에서도 유니폼을 입었고 세인즈버리에서도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그 두 곳에 유니폼과는 이 옷이 주는 책임감과 무게감이 사뭇 다르다. 버스를 타건 전철을 타건 공항을 걷든 간에 입은 옷이 바로 소속을 노출시킨다는 건 꽤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언제나 바른 자세와 좋은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전 두 일터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유니폼을 입고 출퇴근하게 된다. 조끼, 재킷부터 코트, 가방까지 갖춰진 완벽한 외출복이기 때문인 걸까? 굳이 사복을 입고 공항에서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밤 비행기를 무사히 서울로 보내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이때쯤이면 속이 허전하다. 오후 5시쯤 업무 시작 전 허겁지겁 먹은 샌드위치 하나가 이 시간까지 위장을 든든하게 지켜줄 리 만무한 일이다. 이 헛헛함을 달래려 최애 젤리 한 봉지를 뜯어 무릎에 놓고 앞만 보며 뻥뻥 뚫린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는 중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내 뒤로 다가왔다. 무언가 께름칙했지만 설마 나겠어? 하는 마음으로 무시하려는데 급기야 차를 세우라며 경광등을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더럭 겁이 났다. 허겁지겁 차를 세웠더니 경찰 아저씨 두 명이 차에서 내려 인상을 팍 쓰며 천천히 다가온다. 과속을 한 것도 아닌데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어 겁을 잔뜩 집어먹고 차에서 내렸더니 둘이서 나의 유니폼 입은 모습을 쓱 훑어본다. 그리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두 경찰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1차선이 추월 차선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계속 달린 것이 잘못이었다. 한국과 반대인 운전석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일차선일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딱 봐도 큰 잘못은 아닌듯하나 벌금이라도 끊으면 어쩌나 싶어 바로 사정모드로 들어갔다.
"제가 여기서 운전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랐어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공항에서 늦게 일 마치고 배고파서 젤리 집어 먹으며 아무 생각이 운전했을 뿐이에요. 진짜 몰랐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러자 한층 더 표정이 온화해진 아저씨들이 운전 중에 젤리 먹었다는 소리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앞으로는 꼭 주의하란다.
십 년 감수한 마음으로 다시 차에 올라타는데 왠지 유니폼 덕을 좀 본 것 같은 이 느낌은 꼭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유니폼은 그냥 옷이 아니었다. 내 피부색과 영어능력으로만 판단받아 무시당하던 시절을 지나 이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며 기여하는 소속이 분명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보증서와도 같은 것임을 이번 일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물론 더 열심히 유니폼을 입고 출퇴근 한건 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