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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혈단신 영국에서 살아남기(35)

우리 집에 방 남아요.

by 지오바니

2007년 봄


조금 있으면 3년간 살던 해머스미스의 집을 떠나 퍼트니 브리지의 한 플랏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번에도 물론 자기 소유 집으로만 부동산을 하는 Mr. Kerr 씨의 집이다. 유학생들의 속사정을 아주 잘 아는 Mr. Kerr 씨덕에 여태껏 적법하게 Sub-Renting을 하며 학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내가 거실에서 살고 남는 방들을 세 놓은 탓에 플랏 메이트들이 거실을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함께 모일 공간이 없다는 것이 언제나 아쉬웠지만 어차피 다들 각자 개인생활을 하며 밥도 각 방에서 먹는 터라 큰 불편함은 없다고 그렇게 정신승리하며 버티는 중이다. 현재 우리 집에는 나와 룸메이트 언니, 가나에서 온 아저씨 한 명, 영국인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폴란드인 커플이 함께 살고 있다. 일부러 다양한 국적의 세입자를 선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전 세계 각 대륙의 친구들이 한 집에서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별문제 없이 매일매일이 평안한 일상이다.


가나에서 온 아저씨는 정말 성실하기 그지없다. 동생도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을 한다며 한국에 대해 엄청 친밀감을 갖고 있다. 얼마 전 한국에 있는 동생과 전화통화를 시켜준 적이 있는데 떠듬떠듬 서툰 한국어로 인사하는 동생과 통화하는 날 보며 엄청 뿌듯해했다. 그는 우리 집에 온 지 벌써 2년이 넘었건만 월세 한번 밀린 적이 없는 아주 훌륭한 세입자다. 게다가 내가 집을 비우면 가장 오래된 플랏메이트로서 이 집의 집사 같은 역할을 자처한다. 한국 방문으로 몇 주간 집을 비울 때면 집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내게 알려주고 공용공간도 깨끗하게 청소해 놓는다. 특히 공동으로 쓰는 욕실은 아저씨가 사용한 후 가장 깨끗하다. 흑인은 각질도 검은색일 텐데 그가 사용한 욕실은 티끌 한점 없이 깨끗해서 언제나 고맙고 신기한 마음이다. 음식도 매번 집에서 해먹는데 가나 사람들이 닭이랑 감자를 주식으로 먹는다는 것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항상 아프리카의 특별한 시즈닝가루에 닭과 감자를 끓여서 먹는다. 냄새가 특이해서 시도해볼 용기는 없었지만 비주얼은 거의 닭도리탕처럼 친숙한 느낌이다.


가장 최근에 입주한 영국남자아이는 덩치만 컸지 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앳된 테가 얼굴에 그득하다. 어느 날은 본인이 부동산에 취직한 기념으로 동네 펍에 가서 맥주 한잔 하자길래 흔쾌히 따라나섰다. 술엔 잼병인 내가 그나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네스(흑맥주)를 시켰더니 엄청 놀라는 눈치다. 그리고선 그 하프파인트(250cc) 짜리 맥주를 2시간 동안 홀짝이고 있는 나를 보더니 더 놀란다. 그의 얘기론 영국에선 여자들은 흑맥주를 잘 안 먹는단다. 그래서 대뜸 기네스를 시키는 나를 약간 술고래 느낌으로 봤는데 그걸 2시간이 지나도 다 마시지 못하는 걸 보곤 황당해서 웃겼단다.


폴란드에서 온 커플은 둘 다 정말 동유럽인의 전형처럼 생긴 친구들이다. 허연 얼굴에 길쭉한 키와 약간 붉은 금발을 가진 이 친구들 덕에 폴란드 소시지가 독일 것 보다 맛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내 입엔 폴란드 소시지나 독일 소시지나 그 맛이 그 맛 이지만, 이 커플의 폴란드 소시지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에 압도되어 일단 점수를 더 주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힘든 점이 있다면 이 커플은 다른 세입자들 보다는 요구사항이 꽤 많다. 여기는 인터넷이 자주 고장 나는 데 한국처럼 하루 이틀 만에 엔지니어가 방문해서 고쳐주는 편리함 같은 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먼저 엄청 비싼 전화요금이 부과되는 고객 서비스센터에 연락해서 자체적으로 복구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한 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몇 주 후 엔지니어와 방문 예약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이 커플은 내게 인터넷을 빨리 고쳐내라며 엄청 종용한다.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도 독촉을 당하다 보니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매번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해서 해결 방법을 찾을 때까지 떼를 써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요령이 생겨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니면 대충 내가 고쳐볼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뿐만이 아니라 집주인 3년 차에 접어드니 웬만한 집수리는 혼자서도 거뜬히 해낸다. 전등 가는 건 일도 아니고 어느 날은 멀쩡해 보이던 방문이 그냥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문과 방문틀을 연결하는 힌지의 나사가 빠져버린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크게 동요하지 않고 뚝딱뚝딱 방문도 고쳐냈다. 막힌 욕조도 뚫고 변기도 뚫고 오래돼 삐거걱리는 창틀도 복구하며 점점 어디 내놔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활력을 차곡차곡 체득하는 중이다.


이렇게 내 손 안 닿은 곳이 없는 이 집과 좋은 룸메이트들을 두고 굳이 떠나는 이유는 학비를 좀 더 빨리 벌려는 목적이다. 내가 살던 거실까지 세를 주고, 난 다른 집을 또 렌트해서 규모를 키워볼 참이다. Mr. Kerr 씨는 몇 년간 성실하게 월세를 내며 큰 문제 일으키지 않은 데다 집까지 깨끗하게 사용하는 나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 덕에 내 친구들도 여럿 그에게 집을 렌트해서 살 수 있게 되었고 알다시피 지인 소개가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이곳에서 신뢰하는 사람의 소개는 엄청 큰 메리트를 가진다.


이번에 이사 가는 퍼트니 브리지란 동네는 해머스미스보다 약간 더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이곳보다 더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집은 방이 세 개인데 엄청 넓은 거실과 부엌이 함께 있어서 거실을 방으로 쓸 여지가 없다. 그 덕에 거실은 오롯이 플랏메이트들과 즐거운 식사도 하고 함께 얘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예정이다. 더불어 옆 동에는 친한 언니도 살고 있어서 뭔가 더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물론 새집도 영국인들이 선호하지 않는 플랏(아파트), 그것도 임대 아파트이기에 계단 쪽에선 여전히 마리화나 냄새가 나고 엘리베이터는 멈추어 설 때마다 덜컹대서 심장도 덩달아 쿵쾅대는 건 변함이 없다. 그리고 채워야 할 방이 더 많아진 것이 정신적으로는 더 좋은 일이라고 볼 수도 없다. 안그래도 걱정이 많은 나는 매번 방이 비고 바로 채워지지 않으면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긴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이 아니면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감당할 수 없기에 나에겐 이 삶이 현재로선 필수불가결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며 그들의 문화와 음식을 경험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건 이 나름대로 큰 배움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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