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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혈혈단신 살아남기(39)

내 마음은 이미 먼 곳에

by 지오바니

2008년 겨울과 봄 사이


지난 1월 내 졸업식에 참석하러 부모님이 영국에 오셨다. 내가 한국을 떠난 지 만으로 거의 5년 만에 처음 영국을 방문하시는 부모님은 감개가 무량한 모습이셨다.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딸이 수억 만리타국땅에서 혼자 힘으로 학사모를 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색은 안 하셨지만 많이 자랑스러워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졸업식 당일 무대 앞으로 불려 나가 졸업장을 받는 순간 청중 쪽에서 엄마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럼 많은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관객석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활짝 웃어 보였다. 그 한순간을 위해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얼마인가. 지난 세월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비록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일을 한다며 제때 졸업 못할 거라고 악담을 서슴지 않던 담당교수의 저주를 깨고 당당히 졸업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기뻤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이 성취감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모든 졸업생이 학사모를 하늘을 향해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던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학사모가 내 머리에 세게 부딪히며 떨어졌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예전에 길을 걷다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던 안경집이 떠올랐다. 설마 같이 공부한 이 친구들이 내게 그럴 수 있을까 부인하고 싶었지만 예전 기억이 동시에 떠오르며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기분이 침잠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 아직 가시적인 계획이 없는데 벌써 영국은 내게 정을 떼려나보다. 자꾸만 이런 일들이 생긴다. 뿌듯하고 즐거워야 할 졸업식마저 이렇게 잡치고 나니 갑자기 오만 정이 뚝 떨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럽에 처음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는 길, 로마에서 런던의 게트윅 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게트윅 공항은 런던 시내와는 꽤 떨어져 있어 시외버스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버스를 너무 여유 있게 예약해 놓은 탓에 한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 시간을 바꿀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표를 바꿀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공항으로 들어와 가볍게 요기를 하기로 했다.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평화로운 그저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시간을 때울 겸 부모님과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로마 여행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고 있던 때였다. 청원경찰 두엇이 식당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식사하러 오나보다라고 생각하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시 얘기에 열중했다. 그런데 그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설명하지 못할 이상하고 불길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 그들은 다른 손님들과 눈인사를 하며 천천히 우리 가족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우리를 보는 눈빛이었다. 정체 모를 이 불길하고 섬찟한 기분을 떨치려 부모님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 경찰 중 한 명이 아빠에게 말을 걸어왔다. 젊은 시절 무역을 하셨던 아빠도 기본적인 영어를 하실 수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잡담으로 받아들이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 순간 난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종종걸음으로 버스정류장으로 나가는 문 앞까지 우리를 쫓아온 그 경찰들은 결국 나를 불러 세웠다. 알고 보니 한마디로 불심검문 같은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불심검문의 대상이 된 이유는 공항을 자꾸 이유 없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는 것. 난 정말 어이가 없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럼에도 굳이 경찰들은 내 여권정보와 학생증을 확인하고 집주소까지 적어 갔다. 전체적으로 그들의 태도가 불쾌하거나 무례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동양인이 아니었다면 정말 공항 문밖을 몇 번 드나들었다는 이유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했을까. 난 그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가 테러 때문에 비상인건 알겠으나 부모님까지 이런 대접을 받았다는 것에 너무 마음이 상했다.


인종차별도 모자라서 테러범으로 오인을 당하는 이곳에 정말 내가 살아야만 하는 걸까. 하는 자괴감과 모멸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날 이후로 이 나라를 반드시 떠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그렇게 매일 같이 한국의 취업 정보 사이트를 뒤졌다. 그런데 내 간절한 마음이 한국에 닿았던 것일까.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된 친구로부터 영어특기자가 지원할 수 있는 회사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마침 내가 일하고 있는 항공분야와도 관계있는 회사여서 잘하면 경력을 인정받으며 입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서류를 통과하고 면접이 잡히자 난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차피 향수병이 극에 달해 지난 반년 간 거의 두 달마다 방문하던 참이었다. 이쯤 되니 마치 말년 병장이 휴가를 너무 자주 나온 것처럼 이제 가족들은 나를 봐도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고 그냥 '또 왔구나.' 하는 느낌으로 날 맞는다. 그들의 반응이 조금 서운할 법도 한데 이번에는 왠지 마지막 방문이 될 것 같은 기시감에 그들의 무관심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면접을 본다고 반드시 붙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이는 지난 5년간 내가 얻은 건 영어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생활력 그리고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정신력이 지금 내게는 있다. 설사 이번 면접의 결과가 좋지 않다 해도 난 될 때까지 해볼 거다. 지난 5년간 될 때까지 하면 언젠간 그 비슷한 거라도 된다는 걸 난 이곳에서 체험했다. 물론 가끔은 이 지독한 향수병에 눈이 멀어 이곳에서의 안정된 삶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몇 번이고 자문할 때가 있다. 분명 내가 만약 열 살만 많았다면 아마 지금의 삶에 만족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회, 내일 걱정 없이 오늘만 무사히 보내면 되는 업무,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 분명 매력적인 삶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현재에 안주하기엔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은 아무리 곱씹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 보는 거다.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가보지 않고 상상만 하는 것보다는 겪어보는 편을 택하련다. 이제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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