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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혈혈단신 살아남기(40)

귀국-마지막 회

by 지오바니

2008년 5월 17일


내 영구 귀국 소식에 오랫동안 연락 못했던 친구들도 공항에 와주었다. 난 오늘 비행기에 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해야한다. 내 짐을 직접 체크인하고 보딩까지 마친 다음 게이트 앞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마지막 승객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 그간 동고동락했던 아시아나 랩은 원하는 만큼 짐을 싣으라고 배려해 줬지만 사실 옷가지를 제외하곤 한국으로 다시 가져갈 짐이 많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환복을 하고 히드로 공항 보안카드를 매니저에게 반납하니 말 그대로 시원섭섭한 기분이다.


탈 때마다 뿌듯했던 슈마는 아끼고 아꼈던 전자 피아노와 함께 옆 동에 사는 언니에게 주고 가기로 했다. 우리 플랏 옆 동에 살며 엄청난 음식솜씨로 각종 음식에 빵까지 구워서 나눠주던 살가운 언니다. 내 무료한 일상을 책임지던 소니(SONY) 라디오는 우리 집에 살던 플랏메이트에게 주었다. 한국에서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열혈 팬이었던 나는 런던에서도 라디오 듣기를 즐겼다. 주말 벼룩시장에서 단돈 1.5파운드에 득템 했던 이 아날로그 라디오에선 간혹 가다 나오는 섹시한 여성 성우의 멘트, 'More Music, Less Talk'를 제외하곤 주야장천 음악만 흘러나왔다. 이 주크박스는 외롭고 허전한 유학생활에서 소중한 벗이 되어주었다. 거의 5년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막상 떠나자고 보니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그러나 조촐한 짐 덕에 외려 마음 정리가 더 수월하게 느껴졌다.


한국에 취업이 확정된 후 영국생활을 정리할 시간은 단 일주일이었다. 지난 5년에 가까운 세월을 일주일 안에 정리하자니 마음이 너무 바빴다. 돌아보니 나의 삶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집, 회사, 교회 이 세 곳을 쳇바퀴 돌듯 돌며 지난 시간을 목표 달성에만 쏟았다. 그렇다 보니 런던 시내에 놀러 나간 것도 손에 꼽을 정도고, 부끄럽게도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출장 왔을 때를 제외하면 뮤지컬 한번 본 적이 없다. 패션과 뮤지컬, 문화의 도시 런던에 살면서 누리고 산 것이 하나도 없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커다란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혼자 급하게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예약했다. 미리 예매를 못한 탓에 1층 뒤편 좌석에 앉았더니 소리가 울려서 대사를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일단 무엇이라도 했다는 것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친구들과 시내에서 만난 날, 그날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 노란색 봉투가 눈이 띄었다. 저게 뭐냐며 묻자, 두 눈 동그랗게 뜬 친구들이 되묻는다. "너 Selfridge' 백화점 몰라? 거기 가방이잖아, 그 유명한 백화점을 정말 모르는 거야?" 라며 놀려댄다. 가난한 고학생이 백화점 갈 일이 뭐가 있었겠나. 어느 한 친구는 크리스피크림 도넛을 처음 먹는다는 얘기에,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지 않는 눈치다. "요즘 이거 엄청 유명한데 정말 몰랐다고?" 한국엔 아직 론칭하지 않았는지 먹어본 적 없고, 내가 런던에서 요즘 유행하는 게 뭔지 알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살지 않았으니 모를 수밖에.

밖에서 먹는 음식은 너무 비싸 특별한 날이 아니면 외식을 하기 힘들었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단골이던 써브웨이 샌드위치와 공항에서 자주 사 먹은 고기파이, 먹자마자 애정하게 된, 이곳에서는 흔하디 흔한 인도카레, 싼 맛에 교회에서 단체로 자주 가던 치킨집 난도스, 그리고 김칫국맛이 나서 몸이 으슬으슬할 때마다 찾던 3.5파운드짜리 똠양꿍국수 정도가 전부다. 아,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점령한 한낮의 위더스푼(영국에서 가장 흔한 펍/주점)에서 먹는 저렴한 스테이크도 빼놓을 수 없다. 생각해 보니 커피도 스무 살이 넘어 영국에서 처음 마셨는데. 공항에서 휴식 시간 때마다 '커피리퍼블릭'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이 내가 부릴 수 있는 최선의 사치였다.


5년의 시간 동안 내게 무엇이 남았나 돌아본다. 그건 영어, 학위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곁을 내어주지 않고 낯을 가리는 영국 사람들이 너무 어려웠다. 안 그래도 말도 완벽하지 않은 내가 그들과 진정 친구가 되는 길은 정말 요원해 보였다. 깍듯하고 친절했지만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벽돌로 지어진 듯 한 그 공고했던 벽이 사실은 녹아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 없이 홀로 외로운 삶을 살아내고 있던 내게 그들은 엄마가 되어주고 자매가 되어주고 싶어 했다. 그중 가장 특별한 한 명이 내겐 영국 엄마와도 같은 Lynn이다. 나와 같은 항공사에서 일하며 만나게 된 그녀는 전형적인 블루컬러의 삶을 사는 영국의 백인 아줌마다. 처음 보면 매서운 눈매에 자칫 오해할 수 있지만 마음만은 정말 따뜻한 그녀다. 자기를 영국 엄마라 생각하라며 항상 나를 챙겼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홀로 있을 내가 걱정되어 나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이들에게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잘 알기에 그들의 가족이 오롯이 즐겨야 할 크리스마스에 훼방꾼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얼마나 고맙던지...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드디어 당분간은 마지막이 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5년 전 런던행 비행기에서 열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내내 긴장하며 초조해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 생각만 해도 놀랍다.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세상의 반의 반도 못 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알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큰 용기를 내어준 5년 전의 내게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지금 내가 갖게 된 세상을 보는 넓은 시각과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포용력,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 문제를 해결하고자 될 때까지 노력하는 끈기, 이 모든 것을 갖게 해 준 귀한 시간이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며 그 노동의 값어치를 증명하고자 했던 삶이었다.


이제 또 다른 세상으로, 180도 다른 환경으로 나를 시험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덜 두렵고 훨씬 자신감이 넘친다. 물론 분명 내가 생각하지 못한 좌절과 시련이 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멈춘 시계 같은 것이 아니라 매번 닥쳐오는 시련과 주어진 과제를 풀어나가는 그 과정 자체임을 알기에 더 이상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내 제2의 고향, 런던.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

I will mi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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