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붙이가 이곳에 있다.
2007년 가을
오늘은 출장차 영국에 오신 작은 외삼촌을 모시고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명품 아웃렛에 다녀오기로 했다. 엄마의 유일한 남동생인 외삼촌은 외가에서 사업으로 제일 크게 성공한 분이다. 유학 초기 은행계좌를 만들지 못해 고생하던 내게 외환은행 런던지점을 연결해 준 분도 외삼촌이었다. 비록 그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외환은행 계좌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내겐 난생처음 빽이란걸 써본 경험이었다.
외가에는 우리 집만 빼고 온통 아들들만 득실거리는 탓에 나와 내 동생은 어딜 가나 이쁨을 받았다. 외삼촌도 항상 책임감 있고 진중하다며 내게 호의적이셨다. 그렇다 해도 1년에 한두 번씩 명절에만 뵙다가 지난 4년간은 한 번도 뵌 적이 없던 터라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존재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엄마의 눈을 꼭 빼닮은 외삼촌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 목이 매였다. 그 오랜 시간 한 번도 이곳에 가족이 찾아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 새삼 깨달아지며 적어도 오늘은 가족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든든했다. 분명히 이곳에도 친구들과 가족처럼 지내는 룸메이트가 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내게 가족이라는 것이, 피를 나눈 누군가의 존재가 이처럼 커다랗게 다가온 건 이때가 처음이다.
생각해 보면 가족들도 한 번쯤 와볼 법 한 긴 세월인데 그간 아무도 날 보러 오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사느라 바빴고 여동생은 연애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미용과 메이크업을 공부하는 동생에게 영국의 비달사순으로 유학을 오라며, 먹고 자는 것은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까지 했건만 그녀는 콧방귀도 안 뀌고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버렸다.
외삼촌과 함께 커다란 지도책을 펴 들고 찾아가는 초행길은 생각보다 더 좌충우돌이었다. 길을 잘못 들지는 않았는지 계속 길가에 차를 세우고 지도와 씨름을 해야 했다. 영국의 도로 표지판은 한국보다는 훨씬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방향치인 나로서는 표지판만으로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가을에 접어들며 제법 건조해진 날씨 탓에 기관지가 좋지 않은 외삼촌은 계속 마른기침을 하셨고, 그때마다 길을 헤매고 있는 내 탓인 것만 같아 심장이 내려앉았다. 보다 못해 작은 슈퍼에 들러 물을 사드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잘 드시지도 못하는 탄산수를 들고 나온 것이 아닌가. 어찌 이렇게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지 속이 상했다.
이런 내 속사정을 알길 없는 외삼촌은 오랜 시간 혼자서 이곳에서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나를 엄청 대견해하시며 난생처음 갖게 된 조카딸과의 여행길에서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들 귀하게 여기는 집에서 둘째이자 유일한 딸로 태어난 엄마는 위로는 장남인 오빠에게 치이고 아래로는 공부 잘하는 외삼촌에게 밀리며 그리 행복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딸이라고 대학도 보내주지 않은 부모 탓에 엄마는 일하며 동생의 수발을 들어야만 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 마치 하녀처럼 살아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외삼촌이 엄마의 헌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엄마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갖고 있었다. 대학 대신 회사를 다니며 집안 생활비를 벌면서도 누나는 동생의 빨래를 도맡아 하고 매일 도시락을 싸고, 매끼 밥을 챙겼다. 그 덕에 좋은 대학에 갔던 외삼촌은 어려웠던 살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이 먼 곳으로 혼자 가겠다는 날 말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엄마는 자신의 딸들은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살며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가길 바랐던 건 아닐까. 어릴 적 갓 만 5세가 된 내 손을 이끌고 피아노 교습소를 찾은 엄마는 어릴 적 피아노가 그렇게도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안될게 뻔한 데다가 엄한 할머니가 무서워서 입 한번 뻥끗하지 못하고 이불속에서 소리 낮춰 끅끅 대며 울었다는 얘길 해주신 적이 있다. 그래서 엄마는 결혼해서 꼭 딸을 낳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원하는 딸 둘을 낳은 엄마는 지금껏 자신의 딸들에게 더없이 헌신적인 엄마다. 내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엄마의 사랑이 내게 미치지 못한 적이 없다. 엄마를 생각하니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더 강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아웃렛에 도착했다. 아들, 며느리, 외숙모를 위해 나는 이름도 모르는 명품옷과 스카프, 가방을 손수 고르신다. 명품은 커녕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도 기겁하는 우리 엄마와 외삼촌의 모습이 겹쳐지며 평생 고생만 한 엄마가 오늘따라 더 가엾게 느껴진다. 쇼핑이 끝나자 외삼촌은 기름값이라며 내게 큰 금액의 용돈을 주신다. 용돈을 받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금액의 크기를 떠나 일한 대가가 아닌, (물론 운전하는 게 수고롭긴 했다!) 돈을 갖는 것에 이상한 죄책감 마저 든다. 생각치 못하게 생긴 이 돈은 큰맘먹고 엄마에게 줄 선물을 사기로 했다. 그냥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오늘 밤 한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외삼촌을 모시고 공항이자 내 일터로 향했다. 공항 직원들에게 부탁해서 더 좋은 좌석을 잡아 드리고 출국 게이트로 모셔다 드리는 길. 외삼촌은 공항에서 익숙하게 일처리를 하는 나를 감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신다. 꼬꼬마 때부터 보던 조카가 이렇게 든든하게 자신을 보좌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하다신다. 마지막 인사로 쿨하게 영국 스타일로 가볍게 허그를 하는데 촌스럽게 또 울컥, 눈물이 삐져 나온다. 피붙이라는 게 이런 건가보다. 다시 혼자 남겨진다는 설명 못할 서러움과 아쉬움, 그리고 고마움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외삼촌, 잠시나마 이 곳에서 제 가족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