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마약 끊기

통장과 텅장사이

by 지오바니

휴직 후 처음 맞는 월급날.

사실 이제 월급이 없으니 월급날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 20년이 넘도록 써 온 가계부 수입 칸에 오늘 아무것도 기록할 것이 없다 것이 묘하면서도 헛헛하다.

하지만 내 가슴 한 구석에서는 한편으로 '마약과 같은 월급의 마수에서 벗어나 볼 기회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정신승리의 기운이 엿보인다.

월급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다. 받고 나서 일주일 정도는 그 풍요로움에 일이 힘든 줄도 모르다가 그 통장이 텅장이 되어갈 즈음이면 회사일이 곱절은 힘들고 도저히 못 해 먹겠다 싶은 순간이 온다. 그렇게 헐떡헐떡 숨이 넘어갈 때쯤 떡하니 입금이 되면 으슬으슬 몸살을 앓다가 잘 듣는 항생제 먹은 것처럼 약기운이 확 퍼지며 금방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괜찮아진다.


이 패턴이 10여 년이 넘게 이어지니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일 때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월급이 끊길 생각을 하면 더 이상 생각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그런데 막상 입금 내역이 없는 통장을 바라보는 지금, 세상이 무너지진 는다. 물론 난 꼼군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냥 조금 덜 먹고 덜 쓰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곳에 복병이 있었다. 들어오는 건 내 맘대로 멈출 수 있어도 나가는 건 멈추지 않는다는 것. 급여날에 맞춰놓은 각종 공과금과 카드값이 쉴 새 없이 '띠링~띠링' 요란하게 내 통장에 흔적을 남긴다. 허겁지겁 통장 잔액을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니 문득 '약을 단번에 끊기는 어렵겠구나......' 그제야 월급의 부재가 실감이 난다.




지난 10년 간 계속해서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는 정말 착실히 한 눈 팔지 않고 일을 해왔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지금 안식월을 보내고 있는 제주집을 지었고 몇 년 후 지어질지 모르지만 경기도에 작은 아파트도 하나 분양을 받았다. 재테크라곤 예금, 적금밖에 모르는 탓에 주변에서 부동산이며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자랑을 하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차근차근 우리의 페이스를 고수하며 걸어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둘 다 계속해서 돈을 벌고 있으니 위험이 높은 투자에 굳이 눈을 돌리기보다는 벌 수 있을 때 열심히 근로소득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좋은 재테크라고 생각해서다.

물론 요즘같이 예, 적금 이자가 1%인 시대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건 바보나 마찬가지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는 것도 재테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휴직이 불러온 가계 수입의 감소는 실제적인 피해보다 심적인 충격이 더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에 여자도 자아실현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어야 평등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나이기에 잠깐의 공백이긴 해도 왠지 어깨가 움츠려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서 함께 한 결정이지만 잠시나마 홀로 가장이라는 짐을 짊어져야 할 꼼군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날짜만 되면 익숙한 숫자를 찾으려 애쓰며 빈 통장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원래 중독이라는 건 후유증을 남기는 법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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