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군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어날 줄을 모른다. 얼굴엔 뭔가 비장한 기운이 감돌고 '달달달' 조급한 듯 떨어대는 다리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마라토너의 기운이라도 받은 듯 멈출 줄을 모른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빙긋 웃음 지으며 돌아 앉은 그는 뭔가 대단한 걸 만들었다며 뿌듯함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그는 하루 종일 만들어 낸 이 결과물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것인지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내게 제3세계 언어와도 같다. 그래도 최대한 얼굴의 모든 근육을 사용해서 놀란 표정을 짓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단해! 고생했어!"라고 말해준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그에게 참 잘 맞는다고 한다. 트리플 A형인 그의 성격과 극강의 꼼꼼함을 요구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특성은 내가 봐도 찰떡궁합이다.
가끔은 그렇게 완벽히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그가 부러울 때가 있다. 오늘처럼 자신에게 잘 맞고 좋아하는 일을, 심지어 잘 해냈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물론 나도 가끔은 회사에서 비슷한 쾌감을 맛보기도 한다. 내 업무가 내게 잘 맞아서라기 보다는 열심히 준비했던 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졌을 때 그 결과가 주는 보람과 긍지가 있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내가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주어진 현실이 정해 준 옵션 중 가장 좋은 놈을 골라 요리조리 최악을 피하며 여기까지 왔을 뿐. 그렇게 선택한 일을 하며 항상 최선을 다 했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내가 받는 월급 이상은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가끔씩 일이 벅차게 느껴지면 '세상에 좋아하는 일 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냐 되겠냐며 일은 돈 버는 방법으로만 생각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힘든 시간을 버텨왔다.
이렇게 살면 남들이 보기엔 '보통의, 평범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이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사회보장제도가 한없이 열악한 한국에서 밥줄이 끊어지는 건 길바닥에 나앉는 지름길과 같기에 사실 지금껏 옆을 볼 여유 따윈 없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옆을 볼 시간이 생긴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앞만 바라본다. 오로지 저 멀리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혹은 막상 갔더니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을까 봐 두렵고 불안하다. 내가 그렇게도 보고 싶고 찾고 싶던 내 안의 욕망과 재능이 바로 여기 등잔 밑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보이지 않는 앞만 궁금해하며 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난 이미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옵션들 중에서만 선택하며 삶아온 삶에 익숙해져 버렸나 보다. 예측 가능하고 대비가 가능해서 안심이 되는 그런 옵션들 말이다.
시간이 주어진다고 하루아침에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