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눈 때문에못 했던벼르고 벼르던 돌담도 정리하고 1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정화조 청소도 하러 간다.우리 동네엔 정화조 청소 업체가 2개가 있다. 이맘때면 예약이 꽉 차 항상 빨리 와 달라며 사정을 해야 한다. 제주에서 무슨 일을 할 때는 너무 성급하게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 내 성질만 버릴 뿐이다. 혹시 몰라 두 곳다 예약을 했는데 전부 정확한 일자는 얘기해 주지 않고 "가게 되면 전화하쿠다!" 가 내가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돌담 작업은 기존에 있던 돌담을 허물고 옆 자투리 땅을 평탄하게 한 다음 그 땅까지 포함해 다시 돌담을 쌓는 작업이다. 봄이 오면 더 넓어진 마당에 예쁜 동백나무를 심어 바람도 막고 외부에서마당 안까지 뻥 뚫린 시야도 가려줄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좋다.
열흘도 안 되는 기간이지만 제주는 언제나 내게 설렘이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제주를 다녔던 아이는 이제 제법 자기 짐을 직접 챙기는 손이 야물다.
혹시나 하고 내일 날씨를 확인해 보니 호남과 제주지방에 많은 눈이 온단다. 역시 눈은 날 따라다니는 게 맞았다! 지난번처럼 비행기가 결항이라도 돼서 아이와 둘이 공항에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되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이 한 보따리다. 지난달에 눈에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이제 흰색만 봐도 지긋지긋하다.
아이는 혹시 엄마가 겨울왕국의 엘사냐며 아이다운 농을 던지고 제주 지인들도 한 마디씩 '눈을 몰고 다니니 눈의 여왕이 맞다'며 결국 이렇게 새로운 별명을 하나 얻었다.
3주 만에 온 집은 한 달 전 찍은 사진을 복붙 한 듯 또 하얀 눈에 덮여있다.
얼른 난로를 켜 12도까지 내려가 있는 집안 온도를 덮이고 환기도 시키며 집안 곳곳에 사람 냄새를 묻힌다. 목조주택인 우리 집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나무향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엔 낯설었던 이 냄새가 이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제주에 있다는 것을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이 집이 준공한 지도만 3년이 넘어간다. 처음엔 숨을 쉬는 나무집에 적응을 못해 집안 곳곳이 갈라지는 걸 보곤 부실공사에 사기를 맞은 것 아닌가 마음을 졸였다. 또 온 동네 개들이 마당에 들어와 한 번씩 영역표시를 하고 가는 바람에 부랴부랴 대문을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마을 안쪽에 사는 분이 우리 집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우리 집에 사는 개가 자기네 집 양을 물어 죽였다며 따지고 들었다. '우리 집엔 개가 없는데...' 하도 온 동네 개들이 우리 집에서 뛰어 노니 우리 집 개인 줄 아셨나 보다. 하지만 사실 난 그 보다 우리 동네에 양이 산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양이 사는 동네에 있구나. 우리 집이.
시간이 흐르며 이 집에도 이제 정이 듬뿍 들었다. 사물에 이렇게 애정을 갖게 된 건 취직 후 생애 처음 샀던 새 차 (지금은 열세 살이나 먹어 오늘내일한다.) 후로두 번째다. 어떤 이들은 젊은 나이에 집을 지었다며 부러움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하지만, 난 서울에 전세도 못 얻을 돈으로 제주에 집을 짓는 선택을 한 것뿐이다. 땅 사고 집 짓는데 들어간 돈을 다 합쳐도 고작 서울 시내 방 한 두 개짜리 허름한 빌라의 전세를 얻을 수 있을 정도다. 아파트는 물론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돈이고. 이런 선택으로 난 제주에 우리 가족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 세 가족의 성향을 반영하여 직접 설계를 하고 (물론, 공간 구성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는 소리다.) 마음에 드는 도면을 찾기 위해 거짓말 좀 보태 1000장도 넘게 도면을 찾아봤다. 인테리어를 맡길 돈이 없어 참고하기 쉽고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 사진도 몇 장을 봤는지 모르겠다. 허허벌판이었던 그 땅에 콘크리트가 부어지고 골조가 올라가는 모든 장면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지켜보는 마음과 비슷했던 것 같다. 꿈이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이러니 애틋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그런 작은 집이겠지만 내겐 어릴 적 꿈꾸던 푸른 마당을 가진 드림하우스다. 이 집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도시에서의 내 삶도 생기가 넘쳤다. 제주에 내려갈 수 있는 날짜들을 꼽아 놓고 그 날이 오기만을 매달 기다리면 그 시간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을 끝없이 달리는 기분이었다면 제주에 가는 날짜들이 달력에 나타난 이후론 그 날짜까지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시간이 휙휙 잘도 지나갔다.
이 집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이 또 있다. 이도 저도 다 싫으면 그냥 내 집이 있으니 제주에 내려가 밀감이라도 따면서 벌어먹고살면 되지 않겠냐는 믿을 구석이 생긴 거다. 이런 심리적 안정감이 외려 도시생활을 조금은 더 견딜만하게 해 줬다.
여전히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집에서 땀나도록 정성스레 쓸고 닦으며 그 고마운 마음을 전해 본다. 일을 핑계로 내려왔지만 제주는 이 집 덕에 언제나 내게 쉼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