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몸을 움직이는 것은 머릿속 정리에 도움이 된다.
이틀 동안 내린 폭설로 마당에 무릎까지 쌓인 눈을 치우기로 했다. 자신감 넘치게 빗자루를 들었는데 이게 웬걸, 빗질 몇 번에 '헉! 헉!' 숨이 차오르고 허리가 휘는 것 만 같다. 눈은 잘 쓸려지지도 않고 자꾸만 헛돈다. 겉보기엔 소복하니 솜털 같은 눈이 이렇게 무겁다니......
생각해보니 이제껏 살면서 눈을 치워본 적이 없다.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쭈욱 아파트에서만 살았으니 눈을 치우는 건 항상 경비아저씨들의 몫이었다. 관리비를 내는 입주민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밤새 눈이 내렸어도 새벽 일찍 입주민들을 위해 눈을 치워놓은 그분들 덕분에 이렇게 새하얗게 쌓인 눈을 본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새삼 '아직도 안 해 본일이 너무 많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빗질로는 도저히 이 눈을 치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나는 결국 쓰레받기를 가져다 눈을 퍼 내기 시작했다. 옆에서 재밌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꼼군 왈 "눈 한번 안 치워본 티가 나는구먼~ 군대를 안 가봐서 그렇지, 이게 보통 일이 아니야!"라고 훈수를 둔다. 그러다 보고만 있기 미안한지 결국 아빠와 아이까지 식구들 모두 눈밭에 나섰다.
눈을 밟자마자 환호성을 지른 아이는 잠깐 눈을 치우는 척하다가 곧 오랜만에 본 새하얀 눈밭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새하얀 자신만의 겨울왕국을 만끽한다. 낑낑대며 눈을 굴려 올라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1년 동안 학교도 제대로 못 가고 마스크 없인 어디도 갈 수 없던 힘든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힘이 솟구치는 망아지 같다. 삼단 올라프를 만들겠다며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밭을 구르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니 이 또한 내게 힐링이다.
나도 곧 눈 퍼내기가 익숙해진다. 몸을 거칠게 움직이자 저 멀리 퍼내버린 눈더미와 함께 잡생각도 휘 날아가 버린다. 몸에 슬슬 열이 난다. 두꺼운 점퍼도 벗어던져버렸다. 곧 숨이 차오르자 상쾌한 제주의 공기가 가슴 깊숙이 파고들며 코를 지나 머리끝까지 쨍하게 스며든다. 아! 이런 상쾌함 정말 오랜만이다.
1시간 남짓한 육체노동이 복잡한 생각과 일어날 가능성 거의 없는, 하지만 매번 나의 평화로운 일상을 좀먹어왔던 불안을 칼로리와 함께 태워버렸다.
다음날 아침 뻐근한 허리와 쿡쿡 쑤시는 손 때문에 입에서 '악' 소리가 절로 났지만, 뭘까 명예로운 상처를 얻게 된 이 기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