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마주하다

by 정소인

경험은 풍부한 이해를 낳는다. 반대로 비경험은 어설프고도 얕은 허황된 공감만의 원인이 된다.

주변에서 사람을 새로이 만나고 대할 때 주변의 기존 평판을 참고할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또, 위로할 때 겪어보지 못한 일은 감정의 어떠함을 그려보기만 할 뿐 감히 왈가왈부 첨언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에 종종 잔소리를 듣곤 한다.

이는 지레짐작 단정 짓고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히 안다 말하는 것을 주의하려 하는 것이다.

선별적으로 입맛에 맞는 것만을 경험하려 하는 것은 선별적인 지식을 낳게 되고 이는 자칫 사후확신편향으로 빠져 모든 일을 다 알았다 착각하기 쉽고 그릇되게 해석하기 쉽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몸소 겪으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뿐이기도 하거니와 모든 것을 다 직접 겪는다면 몸과 마음은 결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바른 앎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말하고 싶다. 참으로 알 때에 안다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특히 타인에게 행하고 말할 때에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바른 앎은 겸손으로부터 나온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인정하는 용기로부터 배움은 시작한다.

잘 모르는 것은 직접 경험해 보자. 이미 안다 생각하는 것들도 반복해서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배움은 간접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나는 세계대전 중 유태인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눈물 흘릴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의 아픔을 배웠으며 나의 아픔을 경험했기에, 이것이 합쳐질 때에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되고 그려볼 수 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의 범주를 넓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배움을 통해 앎을 넓혀나가며 이해할 수 있는 간접 경험의 범주를 넓혀 나가자. 나무는 그 가지를 뻗을 때에 생명들이 모여든다.

품기 위해서는 가득 찬 완벽한 면이 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드문드문 비어있는 그물이 되어도 떨어지는 삶 하나 받칠 수 있다.

배움들을 잘 기억하여 얼기설기 펼쳐진 가닥들을 가다듬어 망으로 펼칠 때에 그 안에 무엇이든 건지운다.

경험하자. 그것들을 알아가고 그들을 만나가자. 새로이 아는 것을 두려워말고 가만히 있는 것을 오히려 슬퍼하자.

열차는 어디로든 떠날 때에 그 내면의 자리들을 채워가니, 이곳에 남는 공허함 뒤로하고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자.

설산 혹은 벌판일지언정 철로가 세워지는 곳은 언제고 다시 올 수 있으리라.

이미 작품 된 타인의 삶을 향한 판단 잠시 보류하고서 알아가자. 더욱 알아가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무당의 옷을 벗고서 그저 옆에선 또 다른 사람이 되자.

진정한 앎은 앓는 이를 건지울 그물이니, 또 하루 배워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