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것은 극복의 직전이다.
나의 극복하는 마음만큼이나 나를 무너뜨리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또한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순간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버텨냄은, 마주한 상황과 환경이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이 버겁고 어려워 보이는만큼, 또한 커다란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 더 살았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너무 잘해내고 있는 것이다.
1년간 총 3kg 정도의 약을 먹은 적이 있다. 매일 12알씩을 먹었으며 하루 종일 약 기운에 찌들어 살아야했다. 살아야하는가 쉼 없이 고민했으나 뚜렷한 답을 얻지 못했고 무작정 하루를 버티는 연속이었다.
당시에는 하루를 ‘고작’ 버티기만 하는 모습이 비참했고 초라했다. 더 근사한 삶이기를 바랬고 더 아름답길 바랬지만 스스로 자족할만한 어떠한 여건도 갖추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나고보니 버티는 것은 극복의 직전이었다. 버티는 힘과 무너뜨리려는 힘은 ‘1 = 1’이기에 오늘 하루 또 살아낸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아주 작은 수 하나에도 이 균형은 깨질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끌어모은 나의 전부가 앞서 언급한 그 버티는 ‘1’이라면, 무너뜨리려는 ‘1’의 극복을 위해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까?
극복의 과정은 정해져있지 않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일종의 축복의 영역이다.
어떤이는 삶의 깨우침을 통해 단순 1이 아닌 ‘1a’ 와 같은 새로운 함수가 될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통해, 타인의 삶까지 합해 더 큰 수가 될 수도 있으며 또는, 종교적 깨달음 혹은 환경에 대한 이해와 달관으로 인해 동일한 ‘1’ 이었던 시련이 더 작아질 수도 있다. 그때부터 이 삶은 부등식이 되어 현실을 극복하기 시작한다.
버티는 것은 극복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태가 아니라, 극복하기 위한 최상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할 것은 버티는 이 순간이 얼마나 더 길어질 지 쉬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쥐어 짜낸 ‘1’에서 하나 더 나아가는 것은 말도 안되게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버티는 사람에게 섯불리 근거없는 희망을 말해선 안된다.
다만, 버티는 당신과 버티는 나는 결코, 단언컨대, 이것밖에 못하고 있는 한심하거나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한 무너짐을 거부하고 하나의 세상을 견디고 있는 황홀한 투쟁을 이어가는 것이다.
버티는 것은 극복 직전의 상태이며, 삶을 무너트리려는 사회적 자연법칙을 견뎌내며 균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견디는 압력이 높아질 수록 우리는 쉬이 증발하지 않는 뜨거움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이기어 낸 우리의 삶은 농축되어 그 어떤 힌 방울과도 다른 것으로 끝내 증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