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너와 나는 그 언제보다 가까이 지낸다.
마음 먹으면 언제나 너의 생각과 삶을 들을 수 있다. 실제로도 앞, 뒤, 옆으로 붙어지내는 것을 지나 아래, 위로도 층을 달리할 뿐 붙어 지내며 같은 값의 좌표를 하나쯤은 공유한다.
한 토지 위 더욱 많은 핏줄, 함께 가정을 이루고서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이 필요에 의할 뿐,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 이름 석자조차 모르지만 우리는 이웃이고, 서로의 사정 하나 모르지만 누군가가 너와 나를 대표한다. 하루를 더욱 집약적으로 살아가더라도 단순 집단일 뿐 우리의 집합은 없다.
나의 가장 가까우나 저 머나먼 나의 이웃이여, 서로 아는체 한 번 없었던 아쉬움을 이제는 체념하고서 받아들여야 하는가, 정말 그런 것인가
주변에 공허한 관계가 넘쳐난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인력도 닿지 않는 멀어져가는 관계임에도 이따금 기억만 겨우 해낼 뿐 어느 하나 추억하지 않는다. 혹, 그 시간 속 나를 추억할 뿐, 너와 우리를 추억하지 않는다.
보고싶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의 그리움 그 위에, 자주 보더라도 그 가운데서 떨림 하나 없는 관계를 합하니 사실상 그 어느 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다. 사람이 그립지만, 참 사람을 보지 못하기에 고독이 사치라 느껴지는 자책이 반복된다.
우리는 진정 이웃이고, 정말 사촌인가. 우리는 참 사랑인가. 이제껏 역사에 없던 서로가 가장 가까운 시간 속에서 너를 사랑할 준비는 되었는가.
원한다면 사랑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살아간다. 그러나 ‘완벽한’ 것을 바란다면, 나에게 주는 네 사랑도 항상 부족한 것이고 너에게 사랑을 주려해도 좀처럼 오지 않는 듯한 기회를 탓한다.
신이 아닌 우리이기에, ‘그러므로’사랑인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사랑인 것이다.
나는 네게 완벽을 보여줄 수 없기에, 누군가 배울만한 온전한 것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할 때에’ 그것은 ‘그럼에도’ 사랑이다.
서로의 거리가 어느 때보다 가까운 시대이기에, 멀어짐을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물리적 거리와 정신적 거리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우리를 더욱 고독하게하며 우울하게 한다.
질투는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의 어떠함이 나보다 뛰어날 때’ 느낀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의 고독과 우울은 질투와 닿아있다. 나도 적절한 사람과 기회만 있다면 사랑할 수 있는데, 너와 달리 나는 아직 적절한 기회와 환경이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주변의 사람 없음이 고독하고 우울할 수 있다.
만약 지금 내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인 것을 보여주고 싶은, 사랑의 근원이 되는 나를 기대하는 오만한 상태가 아닐까?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사랑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상고하여 보자. 그들은 자신의 완벽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닌, 불완전으로부터 비롯되는 사랑을 보였다. 자신과 타인이 그러함에도 사랑하였고 그러나 행했기에 그것은 사랑이 되었다.
너와 나는 진정 이웃이고 사촌인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 문장을 볼 때에 사랑의 행함 이전에 ‘내 이웃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가?
사랑과 미움도 일종의 자산과 마찬가지다. 시간을 쏟고, 방법을 알고, 투자하는만큼 불어나고 전파된다. 학습해야하고 노력해야 한다. 큰 사랑과 큰 미움은 결코 노력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이야 말로 진정 결과요 산출물이다.
나는 오늘 네게 이웃이고 사촌인가? 참으로 형제이고 우리는 가족인가? 길을 따르는 자는 방황할찌라도 길 위에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이내 곧 다름이 드러날 것이다.
어설프게 거짓된 사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닌, 오늘의 작은 인사라도 참된 마음으로 행하겠다.
내가 매일 웃는 이유는 결국 이러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