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들려주는 사자성어 이야기 - 외전
전국시대가 끝나갈 무렵, 천하는 일곱 나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일곱이지, 국력만 따져보자면 진나라와 나머지 여섯인 상태였죠. 기원전 230년. 스물아홉 살의 젊은 진나라 왕은 마침내 통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불과 10년 만에 여섯 나라를 모두 쳐 전국시대를 끝낸 진나라 왕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진나라의 시초라는 의미까지 더해 진시황제가 되었습니다. 시황제는 통일제국 진나라가 천년만년 이어갈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죽자마자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시황제의 최측근이었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는 차기 황제로 호혜를 밀었습니다. 호혜는 무려 열여덟 명이나 되는 왕자 중 막내인 데다 출신까지 서자였습니다. 적통을 중시하는 진나라에서 서열 맨 끝인 호혜가 황제에 오르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만, 최고 권력자 둘이 밀어붙인 끝에 기어이 이세황제에 오를 수 있었지요. 당연히 적장자인 부소는 그 길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왕자들과 스무 명 가까운 공주들, 그들의 가신들은 싸그리 몰살되었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황제가 된 열여덟 살 호혜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황제의 지위를 최대한 열심히 누리며 작정하고 잘 놀았지요. 일생일대의 찬스가 왔다는 것을 깨달은 조고는 이세황제를 옆구리에 꽉 낑구고, 승상 이사까지 제껴 버린 뒤 진나라의 권력을 오로지 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조고는 이참에 이세황제도 날리고 아예 자신이 황제가 될 야심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모반을 꾸미자니 아무래도 맘이 쫄렸습니다. 그 시절에도 반란에 실패하면 목숨 내놓는 게 국룰이었거든요. 황제야 뭐 별거 없겠지만, 혹여 재상들이 반대해 들고일어난다면 조고의 목은 그날로 떨어질 겁니다. 조고는 일을 벌이기 전에 어떤 놈이 나한테 반기를 들 것인지 꼭 알아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조고는 사슴 한 마리를 이세황제에게 진상하며 말이라고 아룄습니다. 세상 팔자 좋은 이세황제는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하면서도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불러 이 짐승이 무엇인지 물었지요. 대부분의 대신들은 조고에게 빠짝 쫄아서 말이라고 답했고, 일부의 대신들은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습니다. 겨우 한 줌의 대신들만이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이세황제는 이 소동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날 조고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 위험이 있는 대신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뒤부터 사슴을 사슴이라고 답했던 대신들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그렇게 입바른 소리 하는 대신들이 갈려 나가면서 진나라의 관료 체제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평민이었던 진승과 오광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변방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도성에 살고 있던 가난한 자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라는 이세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탓입니다. 하지만 도중에 큰 비를 만나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길을 서두른다고 해도 정해진 기한에 도착하기는 이미 그른 데다, 설령 도착한다고 해도 기한을 어긴 벌로 사형에 처해질 겁니다. 어찌어찌 겨우 살아남는다고 해도 낯설고 척박한 변방에서 고생만 하다가 끝내는 비명횡사 하겠죠. 빠져나갈 길은 없었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칵퉤칵퉤 두 번 하고, 에라 모르게따! 세상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내친김에 아예 나라까지 새로 열어 버렸는데, 초나라를 잇는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장초라고 지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동네인 패현의 한량이었던 유방도 어쩌다 보니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같이 몰려다니던 사람들과 반란군을 꾸리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눈치가 빠르고 일처리가 꼼꼼한 소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빤들빤들 놀던 사람이 반란군이 되었다고 갑자기 뭐가 막 되는 건 아니라서 유방은 진나라의 관군을 피해 습지대에 숨어 지내는 처지였습니다.
진나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회계땅의 태수인 은통 또한 다른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은통은 문송한 사람이라 직접 군사를 부리자니 좀 쫄렸습니다. 그래서 초나라 출신인 항량에게 군사를 맡기려 했지요. 항량은 초나라의 명장 항연의 아들인 데다, 두터운 인망까지 가지고 있으니 밑에 두면 딱이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항량은 은통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이즈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은통 밑에 들어갈 생각이 1도 없었구요. 항량은 조카인 항우를 시켜 은통부터 죽이고 곧바로 회계땅을 장악했는데, 여기서 먼저 치는 놈이 유리하다는 의미의 선즉제인이 나왔습니다. 두 글자를 떼어내고 ‘선제’로 더 많이 사용하는데 왜때문인지 요즘에도 선제 타격, 선제 대응 등 군사용어 삘이 많이 납니다. 필드 전문용어로는 ‘선빵’이라고 하지요.
항량이 몸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지자 같은 항씨 일족은 물론이고 영포 같은 맹장, 범증 같은 재사들이 항량 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범증은 큰 일을 도모하려면 무엇보다 뽀대가 중요하다며, 초나라의 왕족을 찾아 왕으로 세우라는 계책을 올렸습니다. 항량은 무릎이를 탁 치곤 양치기하던 초나라의 후손을 수소문해 왕위에 올렸습니다. 명실상부한 정통 초나라가 부활하고, 그 후광을 등에 업은 항량은 가장 유력한 반란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멸망했던 여섯 나라들이 잇달아 부활하고, 진승이 세운 장초의 대군이 진나라로 진격하는 와중에도 이세황제와 환관 조고의 장대한 삽질은 계속되었습니다. 뭐랄까..사람들이 참 한결같아요. 하지만 부자 망해도 삼 년 간다고 아직은 진나라에도 인재가 남아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장한을 장수로 세워 전국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는데, 막으라고 명령만 했다 뿐이지 정작 싸울 군대가 없었습니다. 장한은 급한 대로 죄수들을 풀어 군대를 꾸리고 서둘러 장초의 대군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오합지졸인 건 마찬가지지만 장초의 군대가 훨씬 많고 사기까지 높으니 장한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싸움입니다. 하지만 장한은 절묘한 개나리 스텝을 착착 밟아 장초의 대군을 여지없이 깨트리고 대번에 조직을 휘어잡았습니다. 대충모은 죄수들이 정예 강병으로 탈바꿈하자 장한은 다른 반란군을 치기 위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한편, 어영부영 지내며 홀수일에는 놀고, 짝수일에는 쉬던 유방 역시 항량을 찾아왔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샘물을 찾듯, 세가 있는자를 쫓는 건 타고난 본성이지요. 항량은 조카인 항우에게 한 갈래, 새로 합류한 유방에게 한 갈래씩 군사를 떼어주고 각각 지휘하게 했습니다. 부활한 나라들이 다들 고만고만하게 아옹다옹거리는 와중에 항량의 초나라만은 착실히 성장하는 중이라,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와 항량이 지휘하는 초나라의 싸움이 천하의 운명이 가를 것입니다.
장한과 항량의 싸움은 항량이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연이은 작은 승리로 장한을 얕잡아 보게 된 항량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현란한 기동으로 장한을 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장한은 부대가 쪼개진 틈새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항량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 한 번으로 어이없을 만큼 쉽게 항량을 잡아낸 장한은 항량이 죽었으니 이제 초나라는 끝났다고 생각해 다음 상대인 조나라를 치러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덧 붙이는 이야기.
모반에 실패하면 온 집안이 멸문당합니다. 요즘처럼 초범이라고 봐주고 나이 먹겄다고 봐주고 그런거 없어요. 애초에 모반이란게 실패를 위로하고 도전을 장려하는 분야가 아니잖아요. 조고의 모반은 결국 성공하긴 했습니다. 호혜는 목숨만 살려주면 조용히 평민으로 살겠다고 애원했지만 어떤 미친 놈이 모반을 하면서 이전 왕을 살려 둡니까. 얄짤없지요.
호혜를 친 조고는 공자 영을 새로운 황제로 올렸습니다. 제딴에는 영도 호혜처럼 쥐락펴락할 생각이었겠지만, 왕위에 오른 영은 친히 칼을 들어 조고부터 죽였습니다. 간신을 죽여 나라의 기강을 잡고자 하는 바램이었으나 이미 진나라는 그 기운이 다한 뒤였습니다.
석달 뒤.
항우는 함양을 쳤고, 진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