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들려주는 사자성어 이야기 외전
항량은 초나라를 부활시키며 숨어 지내고 있던 옛 초나라의 왕족을 찾아서 왕위에 올렸습니다. 훗날 의제가 되는 회왕입니다. 당연히 회왕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나라의 실권은 항량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량이 전사하자 초나라 조정에는 묘한 분위기가 생겨났습니다. 회왕의 권위에 점차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왕도 이참에 항씨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구요. 항량은 워낙에 포스가 어마무시해서 말도 못 꺼내 봤지만, 조카인 항우는 어떻게든 비벼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는 초나라가 살아 있을 때 이야기고, 당장은 진나라의 장한부터 쳐야 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올려 준 항량의 복수도 해야 했구요. 회왕은 고심 끝에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었습니다. 항우에게는 범증을 붙여 장한의 치게 하고, 유방에게는 곧바로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전략입니다. 대충 봐도 유방이 장한을 당해낼 것 같지는 않잖아요. 문제는 함양을 먼저 함락시키는 사람에게 그 땅을 주겠다는 공언을 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항우는 북쪽으로 장한을 쫓아가 싸워 이겨야 하고, 유방은 함양으로 빈집털이를 하러 가는 것이니, 재주는 항우가 부리고 공은 유방이 갖는 그림입니다. 항우는 삼촌이 세워놓은 허수아비왕이 항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 몹시 고까웠습니다만, 장한을 치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후다닥 교통정리를 마친 항우는 서둘러 장한을 쫓았습니다. 항우는 강을 건너며 타고 왔던 배들은 모두 가라앉히고, 밥 해 먹을 솥도 전부 깨트려 버렸습니다. 식량도 삼일치만 남기고 모두 불살라 버렸구요. 이제 장한을 이기지 못하면 물에 빠져 죽거나 굶어 죽을 판입니다. 어금니 꽉 깨문 항우는 장한과 무려 아홉 번을 맞붙어 죽자 사자 싸운 끝에 결국 장한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항우가 얼마나 사납게 날뛰었는지 이 싸움을 지켜본 제후들은 웬만하면 항우랑은 척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이렇게 온 천하에 무용을 뽐내며 진나라의 대군을 깨트린 항우는 ‘항량의 조카’라는 꼬리표를 떼고 ‘천하의 새로운 주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잠시 물러나 숨을 고르던 장한은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나라에서 구원군을 보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목을 노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기절정의 장군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조고와 이세황제는 장한이 이기면 역모로 엮어 죽이고, 진다면 패배의 죄를 물어 죽일 참이었습니다. 오갈 곳이 없어진 장한은 포풍 눙물을 콸콸콸 흘리며 항우에게 항복을 청했고, 짠한 마음이 든 항우는 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항우가 진나라의 마지막 군대의 항복을 받아내며 천하는 초나라가 가져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폭정에 억눌려 왔던 항우의 증오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터져 나오며 이야기가 슬슬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항우가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을 모두 학살해 버린 것입니다. 이 참사로 인해 명장이었던 장한은 제 목숨 살리자고 20만 장병을 희생양 삼은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항우에게는 시황제 못지않은 미친 폭군의 이미지가 굳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항우와 싸우는 이들은 항복해 봐야 죽을 것이 뻔하니, 살아남기 위해 더 악착같이 싸웠구요. 게다가 이 학살로 아버지, 남편, 혹은 아들을 잃은 이들은 장한과 항우의 패망을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항우는 이 학살로 잠시나마 진나라에 대한 분을 풀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제 발로 꽃길을 걷어차고 모난 자갈과 가시밭을 차곡차곡 깔아 놓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항우와 장한이 사생결단을 내는 동안, 유방은 슬렁슬렁 두루뭉술하게 미끄러져 가더니 어어어? 하는 사이에 함양으로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초회왕의 약속대로라면 함양이 있는 관중땅 전부가 유방의 몫입니다. 하지만 진짜로 이 알짜배기땅을 갖겠다고 했다가는 승질이 불같은 항우에게 목이 떨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실제로도 항우와 그 휘하의 장수들은 유방이 함양에 먼저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길길이 날뛰었구요. 유방의 가신들은 해벌레하고 있는 유방의 등짝에 풀스매싱을 날리며 재물에 일절 손대지 말고 도로 함양 밖으로 나가자고 권했고, 퍼뜩 정신이 든 유방은 서둘러 군사를 빼냈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각종 공문서, 보고서, 지도 같은 전략 자산들은 다 챙겨 나왔습니다.
항우는 유방이 함양에 먼저 들어갔(었)다는 소식에 승질승질을 내며 으르렁거렸지만, 범증은 이 사달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이미 꽤 많은 인재들이 항우보다는 성격도 좋고 유들유들한 유방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항우는 성격이 너무 지랄 맞았거든요. 사람을 풀어 함양의 사정을 알아본 범증은 유방이 백성들을 달래고 민심을 안정시키고 있다는 소식에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하루빨리 유방을 치지 않으면 초나라 전체가 통째로 유방에게 넘어갈 판입니다. 범증은 잔치를 벌여 유방을 꾀어내 단번에 암살할 계책을 냈습니다. 유방을 대단찮게 보고 있던 항우는 뭐 이런 일까지 벌이나 싶어서 달갑지 않았습니다만, 범증이 낸 계책인데 그냥 물리기도 좀 뭐해서 마지못해 승낙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항우는 유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술이나 한 잔 하게 홍문으로 오라는 명을 받은 유방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이게 말이 좋아 잔치지 가면 죽을 것이 뻔하고, 안 간다면 항명으로 꼬투리를 잡아 항우의 군대 전체가 쳐들어올 겁니다.
홍문으로 찾아간 유방은 아부 모드를 켜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우리 이참에 형제의 의를 맺자며, 나이는 내가 열 살쯤 더 많지만, 니가 나보다 열 배쯤 더 위대하니까 항우가 형을 하는 게 이치에 맞는다며 설레발을 쳤지요. 유방의 딸랑딸랑에 항우의 화가 좀 누그러지자, 사색이 된 범증은 급히 장수 하나를 불러냈습니다. 칼춤을 추는 척하며 다가가 유방을 치려는 계책입니다. 유방의 모사인 장량은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서둘러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유방의 처남이자 대장군인 번쾌가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항우의 진지로 뛰어들었습니다. 주군들의 잔치에 칼을 들고 들어간다는 건 그 자체로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중죄입니다만, 항우는 번쾌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항우가 번쾌에게 술과 고기를 내리자, 번쾌는 그 자리에서 술과 고기를 뚝딱 해치웠습니다. 항우가 술 한 말 더 마실 수 있는지 떠보자, 번쾌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다이죠부가 그깟 술 한 말에 쫄리겠냐며 한 말을 더 마셨습니다. 유방은 이 난리통을 틈타 미끄덩 도망쳤구요. 일이 엎어진 것을 안 범증이 당장 그놈 잡아오라며 난리를 쳤지만, 이미 유방은 멀리멀리 튄 다음이었습니다. 초나라가 유방의 손에 떨어질 것을 내다본 범증은 힘만 쎈 애새끼랑 천하의 일을 꾸미자니 되는 게 없다며 길고 긴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시황제의 궁에 불부터 놓고 창고란 창고는 죄다 털었습니다. 병사들에게도 약탈을 허용해 함양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났지요. 제국의 수도로 개발되어 있던 함양은 방화, 약탈, 반달리즘 3 콤보가 크리티컬로 터지며 한순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폐허가 되었다고 지리적인 이점이 어디 가는 건 아닙니다. 항우의 가신들은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함양 근처나, 최소한 관중에는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항우는 부귀해진 사람이 고향에 돌아가서 자랑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며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팽성으로 정했습니다. 팽성은 동쪽 끄트머리에 치우쳐 있어 여러모로 수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만, 누구도 항우의 고집과 뗑깡을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범증은 힘만 쎈 애새끼랑 천하의 일을 꾸미자니 뭐 하나 되는 게 없다며 또 길고 긴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간의대부란 군주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재상입니다. 이날 항우의 간의대부는 밥값을 세게 했습니다. 항우의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들은 간의대부는 초나라 똥멍충이가 하는 짓이 꼭 원숭이에게 갓을 씌워 놓은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뚜껑이가 열린 항우는 간의대부를 잡아 솥에 삶아 죽였습니다. 그 뒤로 팽성에 도읍하겠다는 항우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훗날의 사람들은 항우가 패망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동쪽 구석, 팽성을 수도로 삼은 일을 꼽습니다.
덧붙이는 이야기
항우가 저지른 이 학살은 업보의 족쇄가 되어 결정적인 순간들마다 발목을 잡았습니다. 항우의 실수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만, 개인적으로 순위를 꼽으라면 이 무쓸모한 학살을 첫 번째로 꼽을 것 같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포로가 생기면 오히려 이긴 쪽에서 난처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둬 두자니 먹일 입이 너무 많고, 풀어 주자니 쫄립니다. 무기만 뺏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아군 쪽에서 불만이 나오구요. 이긴 놈은 계속 종군해야 되는데, 진 놈은 쓍나하며 고향으로 가잖아요. 그래서 항복한 장병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드는 가는 장수의 기량을 알아보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 장병들을 데리고 진나라로 쳐들어가는 것이 영 못 미더웠습니다. ‘진나라를 치는 동안 이 놈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골치아픈데..’라는 생각만이 항우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래서 내린 결정이 그냥 다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항복한 장한의 장병들은 비록 죄수들이었다고는 해도, 숭악칸 악당들이라기보다 진나라의 빡빡한 법률에 적응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에 가까웠습니다. 항우에게나, 그날 목숨을 잃은 장병들에게나 이래저래 무쓸모하고 안타까운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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