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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Jul 01. 2024

함정에 빠졌다.

근데 판 사람이 없네.

늦은 밤.

집에 갔는데 침대에 웬 여자가 누워 있습니다. 긴 생머리에 상반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벽 쪽으로 돌아 누운 자태가 몹시 곱습니다. 뉘신 지는 모르겠으나, 하늘도 무심치 않으셨구나 싶어요. 설레는 맘을 애써 누르고 살포시 얼굴을 돌려 봅니다.

우렁각시는 개뿔 무슨..


"형? 일어나 봐. 왜 여기서 자?"

"한 잔 하다 보니 버스가 끊어졌다."

"그르니까... 버스가 끊어졌는데 왜 여기서 자냐고."

"버스 끊어졌다고. 칵. 마. 자라. 빨리."


본인이 완벽한 서울 말을 쓰고 있다고 굳게 믿는 선배는 아름다운 산발을 흩날리며 갱상도 싸나이의 박력을 뽐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데 쫄리지 않습니다. 한참 운동하던 때 제 별명이 “인민군 벌목공”이었거든요. 여담으로, 실제로 인민군 벌목공을 봤다는 사람은 없지만 왠지 "인민군 벌목공"이라고 하면 다들 비슷한 이미지를 떠 올리는 것 같습니다. 뭐랄까, 유니콘이나 엘도라도 같은 거죠..


"알았으니까 형이 내려가서 자."

"마. 내가 선밴데.."

"선밴데 어쩌라고. 내려가. 빨리. 나 바닥에서 못 자."

"임마 생긴 건 산또적같이 생기 가꼬. 그냥 자라. 쌔끼야."


어림도 없지요.

선배랑 벽 사이를 파고 들어서 두 발을 벽에 대고 등으로 슬슬 밀어서 바닥으로 떨구는데 성공. 앗싸! 내 집에서 내 침대를 차지한 게 이렇게 기쁠 수가.


미대에는 장발을 하고 다니는 남자들이 매 학번, 모든 학년에 꼭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염색을 합니다. 같은 미용실 가나 봐요.




하루는 어머니가 집에 들른다고 하시네요. 학교 수업 끝나고 일찍 갔는데 어째 분위기가 쎄에-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싶어 괜히 쫄립니다.


"앉아 봐라."

"네.. 저기.. 네.."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민초들의 애환과, 남편 잘못 만난 여인의 서러운 인생사 1부가 끝나고 막 2부가 시작하려 할 때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믿고 간다."


어머니는 정말 크게 마음이 상하셨는지, 인사도 제대로 안 받고 가십니다. 근데... 대체 뭐지? 딱히 뭐 없는데.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고민을 해 보는데, 진짜 뭐 없습니다......


그때, 베개에 붙어있는 노오란 머리카락들이 보입니다.


어? 가만. 이거?


침대에는 긴 머리카락. 욕실에는 칫솔이 두 개. 싱크대에는 예쁜 커플 컵이 두 개. 집이 서울인데 굳이 독립을 해서 학교 앞에 집을 얻어 나간 아들. 1학년때부터 학교에서 밤을 새운다면서 뻔질나게 외박을 했더랬지..


야.. 잠깐. 이거는 진짜 뭔가 많이 억울한데... 하지만 이 상황은 내가 엄마라도 안 믿겠다. 워쩐디야..


어머니는 성인이 된 아들에 대해 나름의 교통정리 시간을 가지신 듯하고, 저는 한동안 밥때 맞춰 금호동 집에 드나들었습니다. 밥은 역시 어머니표 집밥이 제일이라며, 미주알고주알 그 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아륍니다.


"도자학과 누나 전시에 갔다가, 그냥 빈 손으로 나올 수가 있어야지. 제일 싼 컵으로 두 개 샀는데 이게 커플컵이라 난 쓸 데가 없네. 엄마 갖다 드리까? 근데 컵이 좀 묵직해서 설거지하기 힘들 것 같긴 하드라."


"욱이 그 자식은 왜 맨날 우리 집에서 자나 몰라. 아예 우리 집에 칫솔도 갖다 놨어. 아.. 왜 저번에 한 번 봤잖아. 먹다 뱉은 맥주 머리한 놈."


"김치찌개는 우리 김여사 표 만한 게 없어. 그지?"


"괜찮어. 요즘 학교 밥도 잘 나와. 나 가요~."







쓰다 보니, 25년 전 얘기네요. ㅎㅎ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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