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요즘 궁금한 나는 누구인가. #0
늦은 밤.
집에 갔는데 침대에 웬 여자가 누워 있습니다. 긴 생머리에 상반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벽 쪽으로 돌아 누운 자태가 몹시 곱습니다. 뉘신 지는 모르겠으나, 하늘도 무심치 않으셨구나 싶어요. 설레는 맘을 애써 누르고 살포시 얼굴을 돌려 봅니다.
"형? 일어나 봐. 왜 여기서 자?"
"한 잔 하다 보니 버스가 끊어졌다."
"그르니까... 버스가 끊어졌는데 왜 여기서 자냐고."
"버스 끊어졌다고. 칵. 마. 자라. 빨리."
본인이 완벽한 서울 말을 쓰고 있다고 굳게 믿는 선배는 아름다운 산발을 흩날리며 갱상도 싸나이의 박력을 뽐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데 쫄리지 않습니다. 한참 운동하던 때 제 별명이 “인민군 벌목공”이었거든요. 여담으로, 실제로 인민군 벌목공을 봤다는 사람은 없지만 왠지 "인민군 벌목공"이라고 하면 다들 비슷한 이미지를 떠 올리는 것 같습니다. 뭐랄까, 유니콘이나 엘도라도 같은 거죠..
"알았으니까 형이 내려가서 자."
"마. 내가 선밴데.."
"선밴데 어쩌라고. 내려가. 빨리. 나 바닥에서 못 자."
"임마 생긴 건 산또적같이 생기 가꼬. 그냥 자라. 쌔끼야."
어림도 없지요.
선배랑 벽 사이를 파고 들어서 두 발을 벽에 대고 등으로 슬슬 밀어서 바닥으로 떨구는데 성공. 앗싸! 내 집에서 내 침대를 차지한 게 이렇게 기쁠 수가.
미대에는 장발을 하고 다니는 남자들이 매 학번, 모든 학년에 꼭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염색을 합니다. 같은 미용실 가나 봐요.
하루는 김여사가 집에 들른다고 하시네요. 학교 수업 끝나고 일찍 갔는데 어째 분위기가 쎄에-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싶어 괜히 쫄립니다.
"앉아 봐라."
"네?..저기.. 네.."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민초들의 애환과, 남편 잘못 만난 여인의 서러운 인생사 1부가 끝나고 막 2부가 시작하려 할 때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믿고 간다."
김여사는 정말 크게 마음이 상하셨는지, 인사도 제대로 안 받고 가십니다. 근데... 대체 뭐지? 딱히 뭐 없는데.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고민을 해 보는데, 진짜 뭐 없습니다......
그때, 베개에 붙어있는 노오란 머리카락들이 보입니다.
어? 가만. 이거?
침대에는 긴 머리카락. 욕실에는 칫솔이 두 개. 싱크대에는 예쁜 커플 컵이 두 개. 집이 서울인데 굳이 독립을 해서 학교 앞에 집을 얻어 나간 아들. 1학년때부터 학교에서 밤을 새운다면서 뻔질나게 외박을 했더랬지..
야.. 잠깐!!
이거는 진짜 뭔가 많이 억울한데...
하지만 이 상황은 내가 김여사라도 안 믿겠다.
워쩐디야..
김여사는 성인이 된 아들에 대해 나름의 교통정리 시간을 가지신 듯하고, 저는 한동안 밥때 맞춰 금호동 집에 드나들었습니다. 밥은 역시 어머니표 집밥이 제일이라며, 미주알고주알 그 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아륍니다.
"도자학과 누나 전시에 갔다가, 그냥 빈 손으로 나올 수가 있어야지. 제일 싼 컵으로 두 개 샀는데 이게 커플컵이라 난 쓸 데가 없네. 엄마 갖다 드리까? 근데 컵이 좀 묵직해서 설거지하기 힘들 것 같은데?"
"욱이 그 자식은 왜 맨날 우리 집에서 자나 몰라. 아예 우리 집에 칫솔도 갖다 놨어. 아.. 왜 저번에 한 번 봤잖아. 먹다 뱉은 맥주 머리한 놈."
"김치찌개는 우리 김여사 표 만한 게 없어. 그지?"
"괜찮어. 요즘 학교 밥도 잘 나와. 나 가요. 나오지마.”
쓰다 보니, 30년 전 얘기네요. ㅎ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