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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Jun 04. 2024

황천이 어디인가 했더니..

신입이 무슨 벼슬이야? 애 먼 사람 잡을 뻔 했잖아..

몸이 무겁고 찌뿌둥한 게 영 신통치 않습니다. 전날 딸래미 데리고 공원 다녀오면서 살짝 무리했는지, 편도선이  띵띵 부었습니다. 회사 앞 병원에 들러서 약을 한 봉다리 가득 받고 점심으로 죽을 먹습니다. 목이 부으니까 뭐 삼키기가 힘듭니다.

오후에 볼 일이 있어 반차를 내고, 물 한 컵에 약 한 봉지를 털어 넣습니다. 우체국에 들려서 서류를 하나 붙이는데 몸이 좀 이상합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희한한 감각이 몸 전체에 퍼집니다. 손가락이 따끔따끔거리더니 곧이어 손바닥 전체가 화끈거립니다. 술이라도 한잔 마신 것처럼 얼굴이 얼얼해집니다.

‘.. 뭔가 이상한데? 뭐지?..’

이젠 숨소리도 변하고 가슴도 두근거립니다. 잠시 앉아서 무슨 일인지 따져 보다, 퍼뜩 방금 약 먹은 게 생각났습니다. 나오면서 먹은 감기약.

‘.. 병원에 다시 가봐야겠다..’

길가에 잠시 서서 숨을 고르고, 119에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내 목소리에 내가 깜짝 놀랍니다. 벌써 혀가 굳어서 발음이 안 됩니다. 애써 상황을 설명하는데, 전화받는 구급 대원은 낌새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바로 의사를 연결해 줍니다. 당황하면 호흡이 더 어려워질 수 있으니 일단 진정하고, 현재 위치가 어디고, 무엇을 먹었는지, 앰뷸런스가 필요한지를 묻습니다. 회사 바로 앞에 있는 병원이니 혼자 갈 수 있다고 얘기하고 또 앉아서 잠시 쉽니다. 이젠 다리까지 덜덜 떨립니다.

잔뜩 취한 사람처럼 휘척휘척 거리며 병원에 도착해서, 방금 약을 먹었는데 몸이 이상하다는 말을 끝내자마자 쓰러졌습니다. 약 먹고 쓰러질 때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20분쯤. 기절했다가 깼다를 반복합니다.

처음 기절했다가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옆으로 누운 채 정신없이 토하고 있었습니다.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바지를 벗기려고 해서 얼결에 움켜쥐다가 다시 기절.. (나중에 알았는데 셔츠와 허리띠를 풀고 신발도 벗겨서 피가 조금이라도 잘 돌게 하는 거라고 합니다.)

두 번째 깼을 때, 의사는 병원 셔터를 닫으라고 소리치고 웬 간호사가 두 손에 내 신발을 한 짝씩 들고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뭔가 주변이 느리게 지나가면서 엉뚱하게도 그 신발 꽤 무거울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세 번째 깼을 때는 앰뷸런스 안이었습니다. 어렴풋이 이 사람한테 뭐 처방했느냐.. 아, 그럼 이거겠다.. 뭐 주사했냐..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게 들립니다. 병원에서 수 간호사가 앰뷸런스에 같이 탔더라구요. 이거 잘 보고 있다가 수치 떨어지면 바로 하나 더 놔라.. 대충 거기까지 듣고, 나 지금 응급실 실려가는구나…. 그리고 또다시 기절.

응급실에 도착해서 눈을 뜨긴 했는데 정신이 멍합니다.  응급실 간호사가 앰뷸런스에서 내려서 병원 침대에 누우라고 하는데 일어나자마자 다시 쓰러집니다. 다리가 풀렸어요.

눈 떠보니 낯선 곳입니다. 뭔가 어수선하고 정신은 하나도 없는데 묘하게 몸은 상쾌합니다.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돼서 주변을 둘러보다, 응급실 침대라는 걸 확인하고 역순으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간호사가 깨어난 걸 확인하더니 퇴원해도 된다고 알려 줍니다.

응?

아나필락시스 쇼크라고 하네요. 어디서 쇼크가 왔는지 검사해야 하는데 오늘은 힘들고, 입원해서 체크해야 하니까 수납하고 퇴원하라고. 오늘내일은 운전하지 말고. 거울을 봤더니 얼굴이 난장판입니다. 옆으로 누운 채로 토해서 머리 오른쪽에만 자연 왁스가 발라져 있어요. 코트와 셔츠도 오른쪽에만 얼룩이 있고. 핸드폰을 꺼내 봤더니 119에서 위치 추적했다는 메시지가 와 있습니다. 두세 시간 정도 잔 모양이에요. 전화를 들긴 했는데, 나 지금 쓰러졌었다고 어디 연락할 데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간암 판정받으신지 좀 됐고, 누나도 유방암, 우리 딸은 아직 어리고…

‘쓰읍. 내가 지금 어디 아프면 안 되는데..?‘

얼마 뒤에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황천 땅을 살짝 밟아보고 내려온 게 맞다고 하네요. 진짜 복 받았으니 조상님들께 잘하시라고 농담까지 건넵니다. 죽을 뻔했다면서 복 받은 건 또 뭐야 싶어 물어봤더니, 굉장한 행운이 겹친 경우라고 합니다.

아나필락시스 쇼크는 연구도 많이 되어있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도 굉장히 잘 개발되어 알 있는데, 대부분 시간을 놓치거나, 발만 동동 구르다 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빠른 조치가 중요하다고 하네요.

일단 병원에서 쓰러져서, 응급조치들을 굉장히 빠르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119에서도 전화 통화를 해보고,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핸드폰 위치 추적하고 스탠바이 하고 있다가 상암동에서 호출이 오자마자 바로 날아왔다고 하구요. 기절한 상태에서 토하다가 기도로 뭐가 넘어가거나 목에 걸리면 또 다른 문제로 번지는데, 점심에 죽 먹은 것도 천만다행이었다고.. 거기서 스텝 하나만 꼬여도 목숨 잃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검사하다가 또 쇼크가 올 수 있으니, 검사는 병원에 입원해서 합니다. 그날 먹었던 약들을 아주 조금씩 먹어보고 어떤 놈이 쇼크를 일으킨 건지 하나씩 확인을 하는데, 어느 놈인지 안 나옵니다. 게다가 그날 처음 처방받은 약도 아니고, 워낙 흔하게 처방하는 약들이라 안정성이 높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중 하나는  펜잘인데 만약 펜잘에 반응하는 거면 그게 연구감이라고.. 40여 가지 반응 검사를 한끝에 나온 결론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일단 쇼크는 굉장히 다양한 원인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물 쇼크는 아무리 늦어도 20대 초반에는 튀어나온다고 하네요. 그냥 목감기에 워낙 흔하게 처방하는 약들인데, 이 정도 약들을 40대 중반에 처음 처방받았을 리는 없다. 그래서 이런 쇼크들은 대부분 10대에 발현된다. 40대에 약물 쇼크가 오는 건 체질이 바뀌었거나 뭔가 다른 이유다..

한 줄로 요약하면

‘증상은 쇼크가 맞는데 원인은 잘 모르겠다. 미안.‘

사람 환장하죠?

명색이 신촌 한복판에 있는 종합병원인데..

이.. 이보오. 의사 양반. 나 죽을 뻔했다고 하지 않았소?

검사에 반응은 안 나왔지만, 페니실린 계열의 약이 의심스러우니 앞으로 약 처방받을 때 꼭 의사들 보여주고, 지갑 제일 앞에 가장 잘 보이는 칸에 넣어 놓고 다니라고 카드를 하나 만들어 줍니다. 그걸로 끝.

이제 수습을 해야죠. 어쨌든 병원 약 먹고 죽을 뻔했으니, 의료 과실로 고소를 해야 되나, 아니면 빠른 처치를 해줘서 살았으니 인사를 해야 되나 잠시 고민을 해 봅니다. 그런데 의사한테 고맙다고 하려니 이건.. 좀.. 아닌데? 싶어요. 곰곰이 고민을 하다 대충 가닥을 잡습니다. 119 웹 사이트에 가서 그날 응급실에 실어다 준 구급 대원분께 감사 인사를 남깁니다. 그리고 수제 쿠키 두어 팩 사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어제 응급실까지 따라온 수간호사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바닥을 굴러다니며 토하던 사람이 멀쩡하게 서 있으니까 이미지 매치가 잘 안 됐나 봐요..=_=^ 그냥 고갯짓으로 '어제 걔가 납니다..'라는 제스처를 보냈더니, 진심 놀란 표정입니다. (뭐.. 자기 토를 머리에 바르며 굴러다니던 사람이 안경 쓰고 서 있으니 못 알아볼 수도..) 간호사한테 쿠키 꾸러미와 고생했다는 인사를 전하고, 의사와는 응급실 병원비는 의사 양반이 내시오. 검사비랑 진료비는 내가 보험 청구하고 끝내겠소..로 퉁 칩니다. 고마워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애매해서 그 정도 선에서 적당히 매듭짓고 치웠습니다.

정말 황천 땅에 왼쪽 발을 살짝 딛고 왔는데, 정작 황천길 가기 20분 전까지도 평소랑 전혀 다를 바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냥 어제 애랑 너무 놀았나? 11월이니까 이제 좀 따습게 입어야겠다.. 정도였죠. 이렇게 갑자기 죽으면 안 되는데. 우리 딸 치아 교정도 해줘야 되고, 시집간다고 남자 데려오면 어떤 놈인지도 찬찬히 봐야 하는데. 아직 터키 여행도 못 갔는데. (..왤케 비싸..) 물려줄 것도 좀 만들어 놔야 하는데 말이죠.

아마 그날 오후에 신입 저승사자가 사람을 잘못 찍은 게 분명합니다. 쇼크로 넘기고 나서야 딴 사람인 걸 알았나 봐요. 그 뒤로 일사천리로 착착착 진행된 거 보면 저승팀 과장 차장 다 불려 나와서 수습했을 겁니다.

벌써 한 6년 전 일이니 맥주 한 잔 하며 안주거리 삼지만

만약 그날 운전 중에 쇼크가 왔거나

사람이 너무 많은 데서 쇼크가 왔거나

반대로 집에 혼자 있다가 쇼크가 왔으면

아마 황천길에 두 발 다 디뎠을지도 모릅니다.

보너스 받아서 명 줄이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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