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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Aug 24. 2024

문제적 심리상담

강박적이고, 공상적이며, 정서적으로 불화가 많은 사람.

심리 상담사가 되려면 여러 가지 시험을 보나 봅니다. 친구의 와이프가 심리 상담사를 준비하는데, 테스터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세 명 정도 분석해서 리포트를 제출하면, 지도 교수가 체크해 보고 당락을 결정하는 시스템 같습니다.


사이가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또 너무 가깝지는 않은데, 사연까지 약간 있으면 더 좋겠다는군요. 딱이죠? 돈도 준다길래 돈은 됐고, 밥이나 한 번 사는걸로 퉁쳐서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설문 형식의 테스트는 순조롭게 잘 끝나고, 마지막으로 그림 테스트가 남았습니다.




"집을 한 번 그려 보시겠어요?"

"시간은 얼마나 쓸 수 있을까요?"

"그냥 편하신 대로 그리시고 끝나면 알려 주세요."


아.. 뒷마당에 참나무도 두어 그루 있으면 좋겠는데...

그림을 받아 본 친구의 와이프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하지만 쓸데없이 진지한 저는 최선을 다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제가 노빠꾸 성향이 좀 있거든요. 취미 생활이면 또 모를까, 밥벌이를 하려는 사람에게 적당히 대충 넘어가는 건 오히려 그 사람의 노력을 모욕하는 것이다.. 와 같은 몹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남자를 그려 주시겠어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역시 끝나면 알려 주세요."


전신 그뉵, 구릿빛 피부, 크다란 검을 어깨에 둘러메고, 머리는 산발을 한 바바리안을 그렸습니다. 얼굴에는 파란 문신과 흉터도 하나 넣구요. 저는 게임 회사 다니잖아요.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림을 받아 본 친구의 와이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쉽니다. 당혹감과 안타까움, 연민과 고뇌가 어우러진 표정입니다. 눈치가 좀 쎄-해서 저도 슬슬 긴장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여자를 그려 주세요."

"역시 끝나면 알려 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래. 안전하게 가자.’

업계 표준 마법사를 그렸습니다. 새침하게 뒤돌아서 살짝 째려보는 포즈 있잖아요. 어느 게임에나 한 명씩 있는 야무지고 당찬 여자 마법사. 대신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가슴과 궁디 사이즈는 좀 줄이고 맨살 드러나지 않게 옷도 꼭꼭 여며 줬습니다. 마법사라면 응당 딜러니까 스태프도 하나 있어야죠. 흑발 숏 컷에 금색 티아라가 잘 어울리네요. 치렁치렁한 금발은 엘프들이나 하는 겁니다.

훈늉합니다. 휴먼.


"저.. 손에 들고 있는 막대기는 뭔가요?"

"스태프인데요."

"그.. 해리포터가 가지고 다니는 거요?"

"그건 완드구요."

"아. 남편이 롤 할 때 쓰는 거요?"

"그건 와드구요."


저는 그때, 회사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단어들이 사실은 전문용어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자들이 마스카라 얘기할 때 남자들이 느끼는 그 거대한 벽. 그 예비 상담사는 그걸 느꼈을 겁니다.


"여자가 왜 뒤를 돌아보고 있나요?"

"마법사는 포즈를 좀 역동적으로.. 살짝 꽈서.."

"화가 난 것처럼 보여요."


심리 상담에서는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고 하지만 '번개로 지지면서 웃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라고 대답하려니 스스로가 너무 오덕스럽게 느껴집니다. 진짜 솔직하게 ‘녀자 마법사들은 원래 색기를 담당해요..’라고 말했다간 "녀보, 그 오빠 이상해. 만나지 마.." 그럴 것만 같습니다. 솔직히 아까 집 그릴 때부터 표정이 좀 이상했어요.




집에 와서 구글신께 그림 검사를 여쭤 봤습니다.


그림에 디테일이 많다면 대인 관계에 집착함을 나타냄..

지붕에도 창문이 있으면 내적인 고립감..

창 크기가 서로 다르면 정신분열의 예후..

지붕의 강조는 공상에 몰두하는 성향..

연기 나는 굴뚝은 정서적 불안, 성적관심, 거.. 거세불안?

아니 뭐 길지도 않은 걸 막 잘라. 굴뚝에 벽돌 몇 개 깨 먹었다고 너무하네. 진짜. 잠깐! 그런 걸 걱정하는 게 거세불안이니까.. 그럼 맞나? 응??

어허.. 울타리와 꽃에도 좋은 얘기는 없구만..


'아.. 나 진짜 뭔가 문제 있는 건가?'


아까 그래서 표정이 그랬구나..


얼굴에 흉터가 있는 칼 든 남자와

작대기를 들고 뒤돌아선 화난 여자.

감히 찾아볼 엄두도 안 납니다.




한 달쯤 뒤.


직장 스트레스가 좀 나오는데, 그 나이대에 그 정도는 다 나오고, 전반적인 정서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지도 교수님이 그림 보자마자 짧게 한마디 하셨데요.


"이분, 미술 쪽 일 하시죠?"


이쪽 업계 사람들에게는

아예 그림 테스트를 안 한다고 합니다.




연기가 좀 나야지 고기가 맛있어지는데..마야르..그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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