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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Oct 11. 2024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겁도 없이 써보는 영화 리뷰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보다 뒤에 있을 때는 더 그렇구요.


세상살이에 치일 때, 주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내가 세운 목표조차 도달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오는 상처들은 조금씩 마음을 갉아먹고, 부스러진 마음의 틈에서는 열등감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웃자란 열등감은 종종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벼랑 끝에 나란히 선 우주 대마왕 조이와, 그 대마왕의 엄마 에블린의 이야기입니다.


캐릭터와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아래 포스트 전체가 스포일러입니다.



다중우주 | 多重宇宙

Multiverse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멀티버스는, 매 선택의 순간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갈라져서 새로운 우주가 생겨난다는 이론입니다. 우주 저 쪽 어딘가에는 요리사가 된 에블린, 송구락이 소세지인 에블린, 무비 스타가 된 에블린, 피자 간판을 돌리는 에블린 등등 수많은 에블린이 있습니다.


요즘엔 물리학자들도 ‘그냥 막 던지는구나..’ 라는 생각도 좀 들지만, 수학적으로 고민 많이 해서 나온 이론이라고 합니다.. 뭐.. 네..



미쿡 국세청

IRS / Internal Revenue Service

성실 납세자님. 밀주를 팔았어도 돈 벌었으면 세금 내셔야죠.

미쿡은 조세 정의 실현에 늘 진심인 나라입니다. 농담 반 진담 반, FBI나 DEA가 마약상 두목네 집을 째려 보고만 있을 때, IRS는 문 뿌시고 쳐들어가서 딱 세금만큼만 털어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세금을 "공정" 하게 털어가기 때문에 미쿡 국세청은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는 독특한 포지션을 가진다고 하네요.


징세존엄 디어드리 여사께서 바로 미쿡 국세청 소속이시지요.



만다린과 광둥어

官話, 廣東話/广东话

..이 만다린이 너겠냐? 응? 너겠어?..

표준어인 만다린은 듕국 북부를 중심으로 9억 명(…) 정도가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반면 광둥어는 중국 광둥성 주변과 홍콩, 싱가포르, 마카오 등지에서  대략 8천만 정도가 사용하는 소수(…) 언어입니다. 두 언어는 중국어라는 큰 테두리에 함께 묶여 있지만, 발음도 다르고 문법도 달라 그냥 별개의 언어로 취급합니다. 일단 서로 말이 안 통해요.


에블린의 가족 역시 언어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에블린의 아버지는 광둥어를 사용하고, 남편 웨이먼드는 만다린을 사용하며, 딸 조이는 아예 모국어가 영어입니다.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고, 조이는 좀처럼 중국어가 늘지 않죠. 가족이지만 서로 말도 잘 안 통하고, 말도 잘 안 통합니다.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이별도 연습이 필요한, 어른이들의 세련진 사랑

제목인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꽃처럼 아름다웠던 짧은 한때를 말합니다. 잘못 발음하면 심한 욕이 되니까 특히 발음에 주의하시구요. 솔직히 20대 초반에 봤을 때는 뭐 이딴 영화가 다 있나 싶었습니다. 붉으딩딩한 포스터만 보면 애로애로하고 에헴에헴한 영화 같잖아요. 그러나 쉰 즈음에 다시 보면 전혀 다른 의미로 어떻게 이런 영화가 있나 싶습니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그럼요. 알죠. 내가 잘 안 풀렸으니까 자식은 잘 풀리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맘 같아서는 남 부럽지 않게 이것저것 다 해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저 걱정과 잔소리 말고는 뭐 특별히 해줄 수 있는게 없습니다. 겉포장만 사랑인 잔소리가 아니라, 내용물을 사랑으로 꽉꽉 채운 잔소리라서..


그래서 듣는 사람이  미칩니다.




에블린

Evelyn Wang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에블린의 인생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열심히 발버둥 치며 살고 있는데, 딸 조이는 점점 삐뚜러지고 있습니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인연을 끊겠다던 아버지는 에블린에게 밥투정을 합니다. 배우를 꿈꾸던 젊은 날은 부스러지고, 지금은 가압류된 빨래방만 남아 있습니다.


만약.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빠가 날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조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에블린은 늘 포기하고, 계속 희생하며, 어떻게든 잘 살아 보려고 아둥바둥거렸지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우주대마왕 조이가 느끼는 절망감과 패배감은 사실 에블린도 늘 느끼고 있던 감정이죠.


딸 조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에블린은 조이의 진짜 외침을 듣고, 조이의 절망감에 깊이 공감합니다.



에블린은 빠따를 들어 압류될까 봐 전전긍긍하던 빨래방의 유리창을 깨 버립니다.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편 웨이먼드를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찌르며 말합니다.


“옆 동네 우주에 가 봤더니, 너 없는 내 인생은 참 갠춘하더라..”


웨이먼드는 놀란 눈으로 에블린을 바라보지만, 비난하거나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조이 / 조부 투바키

Joy Wang / Jobu Tupaki

주주 투바퀴(X), 조부 토박이(X), 주주 츄바카(..츄이?..)

우주 대마왕.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우주 대마왕입니다. 에블린과 웨이먼드의 외동딸로 대학 때려치우고, 여자 친구 베키와 동거 중입니다. 문신도 했고, 살도 좀 쪘죠. 에블린은 이런 딸의 모습이 영 마뜩지 않습니다. 조이 역시 엄마의 눈총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구요.


저 쪽 우주의 조이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버스 점프”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늘 부족했습니다. 이 우주나 저 우주나 엄마의 기댓값에는 늘 한계치가 없어요. 결코 노-오력이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엄마 친구 아들“과 끊임없이 비교되는 “엄마 딸”이기 때문입니다.


에블린의 닦달에 버스 점프를 계속하던 조이는 결국 일반적인 가치와 윤리관을 초월해 버리고 맙니다. 우주 대마왕이 된 조이는 블랙홀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고 (심심해서 베이글에 우주를 끼얹고 소금을 좀 쳤더니 블랙홀이 되었다네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씁쓸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초록색 닭발 달린 옷을 입었는데 진심 무섭..

모든 것이 다 의미 없는 것들이라면,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자신도 부끄러울 필요가 없겠죠. 조이는 블랙홀로 들어가 빠져나갈 길 없는 자신의 방황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해 줄 사람을 찾아 온 우주를 헤맵니다.


지친 조이는 블랙홀로 뛰어들어 사라지려 하고 있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조이가 블랙홀을 아용해 우주를 파괴하려 한다고 지레 짐작하고 있습니다. 겁이 난 이들은 엄마인 에블린에게 조이를 죽이라 닦달하고, 조이를 구하려는 에블린을 막아서기까지 합니다.



웨이먼드

Waymond Wang

..야. 이 화상아. 눈알 좀 다 갖다 버리라고 / 응? 왜?

자포자기한 에블린에게 옆구리를(..) 찔린 뒤에도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블린을 보호하며, 싸움을 그만둘 것을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오오..지쟈스..오오..


에블린이 진심과 노-오력으로 싸우는 투사라면, 웨이먼드는 친절과 상냥함으로 싸우는 투사입니다. 웨이먼드는 딸의 여자 친구에게도 스스럼없이 따뜻하게 대해주고, 에블린이 딸 조이와 싸울 때에도 선을 넘지 못하도록 잘 다독입니다. 에블린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에블린의 가족을 지탱해 주고 있던 것은 웨이먼드였습니다.


사랑을 설파하다 옆구리를 찔리고, 3초만에 일어나 심안을 뜨시며, 세상의 더러움을 박박 씻어내는 상냥한 빨래방 주인. 유명한 서양 분과 유명한 동양 분을 합쳐 놓은 듯한 그 분이 바로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입니다.



조부 투바키의 검은 눈알과 웨이먼드의 하얀 블랙홀

조이의 베이글 블랙홀처럼, 웨이먼드 역시 독특한 블랙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크기가 훨씬 작고, 딸그락 거리며, 여러 개가 있지요. 빨래 주머니에도 붙이고, 냉장고에도 붙이고, 장난칠 때도 사용합니다. 웨이먼드의 방식에 깨달음을 얻은 에블린도 이마에 하나 갖다 붙이며, 심안으로 우주를 보기 시작합니다.



드어드리

Deirdre Beaubeirdre

언니는 말이야. 영수증만 봐도 다 알 수가 있다.

서슬 퍼런 진 보스. 똥꼬 마개 트로피가 수두룩한 징수의 화신. 징세존엄 디어드리 여사는 영수증만 봐도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는 절륜한 내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에블린이 헤매고 있는 거지, 디어드리는 오히려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대충 봐도 빨래방에 노래방 기계는 비용처리가 안 될 것 같잖아요. 조이를 닦달하는 에블린도 실은 조이에게 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실 누군들 안 그렇겠어요.


야. 쿠키 맛있드라. 그래도 영수증은 다시 챙겨와.

징세존엄 디어드리도 인생의 씁쓸한 패배감을 혼자 삭이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실적과 경력만 쫓다가, 정작 남편은 놓친 것 같아요. 이혼 서류를 내밀던 그녀의 남편은 ‘너 같은 뇨자가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고 쏘아붙였다네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반려는 아니야..라는 뜻이겠죠.


소세지 우주의 디어드리가 사랑을 갈구하던 것처럼, 빨래방 우주의 디어드리 역시 애정과 위로, 쿠키가 이해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주 대마왕이나 조세 대마왕이나 뭐..니나 내나..뭐..



공공

GongGong

대의를 위해서다. 넌 네 딸을 죽여야 해.

공공은 어르신, 아버지, 노인 등을 통칭합니다. 저쪽 우주의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그냥 연구소 높은 분쯤 되시나 봐요. 하지만 우주를 구한다며 딸에게 손녀를 죽이라 다그치는 걸 보니, 뚝하고 정 없는 성격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에블린이 가난한 웨이먼드와 결혼하자, 공공은 한동안 에블린과 인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에블린은 빨래방이 가압류당했다는 말도, 손녀 조이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도 꺼내지 못합니다.



All at Once

그래. 나 성공하지 못했어. 그게 뭐 어때서.

심안을 “붙인” 에블린은 우주를 꿰뚫어 봅니다.

싸우는 게 아니라, 감싸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에블린은 다양한 우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보듬어 줍니다. 라따구리도 구하러 가고, 소세지 디어드리도 안아 주며, 젊은 이들을 엮어 커플도 만들어 줍니다. 에헴한 냥반에게는 재갈 물려서 궁디 찰싹도 해주구요.


이제 자신의 문제도 정리해야죠. 아버지 앞에 선 에블린은 자신처럼 부족한 사람에게 웨이먼드처럼 너그러운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자신과 똑 닮은 조이에게도 베키처럼 다정한 사람이 생겼음을 당당하게 알립니다.


딸의 성장에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아버지는 손녀의 애인 베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아, 오지 말라고! 돌 우주에서는 움직이면 안 돼! / 시꾸랍. 내 맘이야.

마침내 에블린은 조이를 따라잡는 데 성공하지만 조이의 상처는 생각보다 너무 깊습니다. 엄마가 드디어 당당한 사람이 된 것에 대해, 조이는 진심과 부러움이 섞인 축하를 전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지쳐버린 조이는 엄마처럼 당당해질 자신이 없습니다. 조이는 자신을 그만 놓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 내 새끼 많이 힘들었지? 엄마가 미안. 실은 엄마도 힘들었어.

하지만,

어떤 엄마가 자식을 놓을 수 있을까요?


조이는 잔소리 한 바가지와 함께 블랙홀에서 끌려 나옵니다. 물론 남편 웨이먼드와 아버지의 필사적인 도움이 있었죠. 모든 것이 찰나의 시간 위에 존재하는 부질없는 것들인데 괜찮냐고 묻는 조이에게 에블린은 조이를 꼭 끌어안으며 대답합니다.



사람은 실패했을 때 쓰러지는 게 아니라, 제대로 위로받지 못했을 때 쓰러진다고 합니다. 이해와 위로가 필요했던 조이는 ‘나 지금 아프다’고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에블린은 엄마 이름 막 부르지 말라는 잔소리와 함께 조이를 꼬-옥 안아 줍니다.




95th Oscar

Jamie Lee Curtis | Best Supporting Actress

Ke Huy Quan | Best Supporting Actor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말을 뒤집으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비율로 본다면 실패가 딱히 비난받을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대가 클수록, 그 바람이 더 절박할수록, 더 많이 사랑받을수록 실패했을 때 더 많은 비난과 눈총을 받습니다.


혹시 아놀드 형님 나오시는 트루 라이즈를 기억하실까요? 국세청 직원 역을 맡은 제이미 리 커티스는 트루 라이즈에서 엄청난 몸매를 뽐내는 여주인공이었습니다. 레이먼드 역의 키 호이 콴은 인디애나존스2 에서  쇼티 역을 맡았었죠. 그리고 둘 다 꽤 오랫동안 이렇다 할 커리어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제이미 리 커티스와 키 호이 콴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95회 오스카에서 각각 여우조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그동안의 설움을 씻어 냈습니다.


참고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95회 오스카에서 7개 부분을 석권했습니다. 처음 볼 때는 영화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잠깐 뇌정지가 옵니다만, 한숨 돌리고 나면 이게 SF의 탈을 쓴 엄마와 딸의 갈등 이야기 였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덧)

에블린은 딸 조이의 여자 친구 베키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제 베키에게도 잔소리를 하네요.

너 머리 좀 길러야겠다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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