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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Oct 19. 2024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겁도 없이 써보는 영화 리뷰

월터 이 냥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다소 심플한 원래 제목에 비해, 번역이 너무 나갔다는 논란이 있나 봅니다. “..상상은 현실이 된다..” 는 확실히 말랑말랑한 코미디나 판타지 느낌이 나긴 하죠. 영화의 내용 역시 월터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니까,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갑니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를 원문 대로 충실히 번역해 보면..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응? 크흠…



캐릭터와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아래 포스트 전체가 스포일러입니다.



라이프

LIFE

2021년. The Last Print 라는 타이틀로 라이프 사진전이 있었네요..

1935년에 창간해 한 시대를 풍미한 사진 잡지. 글만 있는 기사도 물론 좋지만, 생생한 사진이 있으면 더 좋겠죠. “심통 난 처칠"처럼 인상적인 사진을 남기며 70여 년간 발행되었으나, 계속된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대폭 축소. 현재는 온라인으로 옮겨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Space Oddity

David Bowie / Chris Hadfield 2015

2015년. 실제 우주비행사인 크리스 해드필드가 다시 불렀습니다.

데이비드 보위가 1969년에 발표한 히트곡입니다. 톰의 우주선은 열렬한 관심 속에 성공적으로 발사되었지만, 뭔가 문제가 발생해 ‘별들이 아주 다르게’ 보이는 항로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톰은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우주를 떠돌게 됩니다.


세릴은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에 뛰어드는 톰의 용기에,

테드는 세상과 멀어진 톰을 조롱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스트레치 암스트롱

Stretch Armstrong

크아아아아아..놔라. 이것들아!

이 분, 생각보다 유명한 분이시네요. 1976년에 출시한 이후 무려 48년 동안 팔리고 있습니다. 미쿡은 물론이고 뿌랑스, 일본, 등등 80년대에 '웬만큼 먹고살 만한' 나라에서는 거의 다 팔렸고, 장편 영화 기획도 몇 번 있었습니다. 디즈니와 유니버셜에서 눈독을 들였다네요.


모든 세대가 한 번쯤은 땡겨 본 장난감으로 마치 우리나라의 윷놀이나 자치기, 또는 스타크래프트 같은 포지션인 것 같습니다. (남의 기지 앞에 벙커를 짓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며...)



히말라야

Himalayas

인간들의 복잡한 사정과는 별개로, 산은 참 멋있네요.

히말라야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중국 등등 여러 나라에 걸쳐 있습니다. 월터는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히말라야에 들어갔는데,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07년쯤이면 미쿡과 아프가니스탄이 아직 전쟁 중일 때니까.. 입국할 때  고생할만하군요.


속세와는 뚝 떨어진 곳이고, 눈 표범이 사는 곳이며, 월터가 어른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월터 미티

Walter Mitty

눌러! 누르라고! 라이킷을 왜 고민해! 눌러!!

단정한 셔츠에 청회색 넥타이. 무채색 점퍼에 무채색 가방. 좋아하는 여자에게 "윙크"를 날리는 것조차 주저하는 월터는 라이프지에서 현상 담당자 (Negative Assets Manager)로 일하고 있습니다. 네거티브 에셋의 “네거티브”는 물론 필름을 말합니다만, 맥락상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월터를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16년을 근무한 회사의 주인이 바뀌며, 대규모 정리 해고가 예정된 상황. 밉상인 인사 담당자에게 안 좋은 첫인상을 남긴 월터는 이래저래 심란합니다.


한편, 라이프의 폐간 소식을 들은 사진작가 숀은 마지막호의 표지로 사용해 달라며 ‘일생의 역작’을 월터에게 보내오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필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숀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월터는 직접 숀을 찾아 나섭니다.






첫 번째 여행 -

속이 뻥 뚫리는 월터의 활강

유년기의 월터는 모히칸 머리를 하고, 스케이트 보드 대회에서 우승을 한 활발한 아이였습니다. 쭉쭉이 암스트롱 장난감을 가장 좋아했었죠.


난생처음 다른 세상(-land)을 밟은 월터는 “암스트롱”을 스케이트보드와 바꿉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넥타이를 찢어 핸드 브레이크를 만듭니다. 보드에 오르자 잊고 지냈던 어린 날의 적극성과 활동성은 기지개를 켜고, 신들린 듯한 활강 끝에 완전히 깨어납니다. 월터는 미처 끝맺지 못했던 유년기의 성장을 그렇게 매듭짓습니다.


아쉽게도 간발의 차이로 숀을 놓친 월터는 잠시 파파존스에 들리지만, 왠지 모를 불편함에 곧 일어서 나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 파파존스였습니다. 하지만 부쩍 커버린 월터에게 파파존스는 확실히 좁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월터는

다음 세대의 월터에게 스케이트 보드를 물려줍니다.






두 번째 여행 -

I am alone.

결국 회사에서는 짤렸습니다. 이제 “일생의 사진”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그래도 월터는 숀을 찾아 히말라야로 떠납니다. 월터의 첫 번째 여행이 유년기를 매듭짓는 여행이었다면, 두 번째 여행은 “으른”이 되기 위한 여행입니다.


청소년 시절, 월터는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월터를 응원하며 다이어리를 선물해 주셨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월터는 유럽 여행 대신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다이어리는 낡은 상자 한 켠으로 들어갔고, 시간이 지나며 기억에서도 지워졌습니다.


히말라야 중턱에서 세르파들과 헤어진 월터는 혼자 산을 오르며 다이어리를 적습니다. 목표는 있지만, 그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정말 만날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는 여정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등반 끝에 월터는 드디어 숀을 만납니다.


단언컨데 수컷들에게 축구공은 가장 완벼칸 장난감입니다.

필름의 행방을 묻는 월터에게, 숀은 선물로 준 지갑 속에 있다고 답해 줍니다. 필름이 들어 있는 줄 몰랐던 월터는 이미 지갑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일생의 역작’이 바로 코 앞에 있었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월터는 허탈감에 말을 잇지 못합니다.


숀은 그런 월터에게 눈표범을 보여주며, 아름다운 순간에 잠시  머무는 것도 괜찮다는 메세지를 전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 월터는 미련을 훌훌 털어 버리고 숀과 함께 마을 아이들과 어울립니다. 하루 해가 저무는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그렇게 아이들과 두 어른은 즐겁게 뛰놀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검게 탄 얼굴에 거친 수염, 풀어 헤친 셔츠에는 가..가슴털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돌아온 월터는 확실히 달라져 있습니다. 여행 금지 국가를 다녀와 LA 공항에서 걸린 월터는 선물 받은 피리를 되찾으려 공항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입니다. 물론 내동댕 + 스프레이 촥촥! 에 그 즉시 제압되지만, “윙크”를 보내는 것도 주저하던 월터는 이제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낼 수 있는 “으른”이 되어 있습니다.



숀 오코넬

Sean O'Connell

어쩌다 보니 만악의 근원

16년간 월터와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사진작가. 월터와는 거울 맞은편에 있는 인물이자, 어쩌면 월터 자신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 자체를 사랑하는 작가로 라이프의 폐간 소식을 듣고, 월터의 일하는 모습을 찍으러 뉴욕에 들립니다. 눈 표범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월터의 모습을 찍은 숀은 필름을 가죽 지갑에 넣어 월터에게 선물합니다만.. 필름이 지갑에 들어 있다는 얘기를 안 해서..


월터는 적극성과 활동성이 부족한 직장인일지 모르나, 늘 자기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한편 숀은 항상 아름다움을 쫓는 최고의 작가지만,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둘 다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으니, 서로 덜고 더해야 좀 더 균형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겠죠.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숀과 함께 짝을 이루어 공을 차는 동안, 월터는 비로써 균형감을 가진 성숙한 “으른”이 됩니다.



쎄릴 멜호프

Cheryl Melhoff

안녕? 난 유령 표범이야. / 그래? 난 치타인데..

월터의 동료 직원. 다리가 셋인 강아지와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다리 둘 달린) 아들이 있죠. 월터에게 여러 조언과 도움을 주며, 특히 톰 소령의 도전과 모험에 더 큰 의미를 두어 월터를 북돋아 줍니다. 그린란드에 도착한 월터는 셰릴이 스페이스 오디티를 불러주는 상상에 용기를 얻어, 기꺼이 위험한 모험을 향해 뛰어듭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아내로 등장한다고 하는데, 실제 서사적 역할도 아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훗날, 눈 표범으로 각성한 월터에게 조바심을 느끼던 그녀는 치타가 되어..)



테드 핸드릭스

Ted Hendricks

무례하고, 경박하며, 몰상식한 구조 조정 책임자.

어떻게 저 위치에 올라갔을까 싶습니다. 묘하게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떠 오르는 사람이 한 둘 씩은 있으시죠? 테드가 월터에게 클립을 던지며 "톰 소령"이라고 조롱하는 데에서, 남의 “실패”에만 집중하는 그의 인격이 잘 드러납니다.


까맣게 탄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이 자라난 월터는 말끔한 테드에게 조용한 어조로 일침을 놓고, 기세에 눌린 테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지위를 무기 삼아 클립을 던지거나 이마를 툭툭 치던 극 초반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월터의 아버지

아내에게는 다정한 남편, 자녀들에게는 든든한 멘토셨던것 같습니다.

월터의 모히칸 머리를 직접 밀어주고, 유럽 배낭여행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셨으나 급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월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계셨었으면, 월터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겁니다.


아버지와의 때 이른 이별로 월터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문을 닫지 못한 채, 넘치는 활동성과 창의성을 파파존스 유니폼 안으로 밀어 넣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스케이트 보드와 여행 다이어리를 내려놓은 월터는 얌전얌전한 직장인이 되었죠.



피아노

아쉽지만, 예전에 놓았어야 할 추억.

피아노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결혼을 기념하는 남편의 선물이고, 월터에게는 단란했던 시절의 추억이 담긴 유산이죠. 하지만 형편에 비해 너무 큰 피아노는 계속 제자리를 못 잡고,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모서리에 찍힌 흠집은 “추억” 이외의 현실적인 의미가 없는 이 피아노의 현재 상황을 잘 말해 줍니다.



어이구. 가격이 꽤 나왔..에헴

내적인 성장을 끝내고 “으른”이 된 월터는 피아노를 팔아 성장의 비용을 지불합니다. 식구들도 모두 이 피아노를 홀가분하게 보내 주죠. 월터의 아버지는 아들의 성장을 끝까지 지켜봐 주지 못했지만, 스스로 성장한 월터는 아버지의 유산을 거름 삼아 훈늉한 어른이자, 또 다른 아버지가 됩니다.



자기 일만 잘하는 것도 사실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라이프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진은 일에 집중하며 작가의 의도를 고심하는 월터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정수를 담은 역작’이자, 라이프의 모토에 가장 부합하는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실제 라이프의 마지막호에는 케네디 동상 사진이 실렸습니다.)



부끄럼쟁이 눈 표범. 아름다운 건 그저 눈에 담는 거라네요..


크게 보면 어른들 버전의 파랑새 이야기입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지도 않구요.

애들과 보기에는 밋밋하다 못해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처 닫지 못한 어린 날의 문을 닫을 때.

새로운 문을 열고 으른의 방에 들어설 때.

"좋아요" 보내기도 주저하던 월터가

셰릴의 손을 덥석 잡을 때.

나도 모르게 월터를 응원하게 됩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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