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
몇일 되었다. 내 인생에 씬스틸러 같은 새끼가 있는데 뜬금없이 쳐들어 와서는 맥주 몇캔과 선물로 받은 거라며 시거를 박스째 들고 왔다. 맥주를 마시고 시거를 피면서 낄낄 거리다가 갔다.
죽마고우이자 친척이자(6촌 쯤 된다) 절친이였다. 이 새끼와 1년에 한두번 소식만 전했다. 나도 그 새끼도 사는게 참 지랄 맞았다. 사십 중반에 들어서야 오래된 외면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이 흐릿해질때가 되어서야 연락이 왔다. 굳이 옥타브를 올릴 에너지도 남아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고 몇년이 지나서 난 강원도로 직장과 집을 옮겼고 또 이 새끼도 강원도를 베이스를 출장을 다니면서 가끔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 동안은 쭈욱 담배가 나의 가장 절친이였다.
첫 담배는 한숨이였다.
1994년 1월 15일, 대구에서는 보기 힘든 눈이 제법 온 날이였고 미끄러운 길을 신기해 하며 중앙도서관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정석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하다 열람실에 가서 결국 읽음직한 소설을 빼어 들고 한권을 다 볼때까지 엉덩이도 들썩이지 않았다. 또 그게 죄책감을 가져 왔다. 허구헌날 도서관에서 가지고 온 책이나 서고에 꽂혀 있는 책은 잘 보면서 도무지 교과서나 교재는 보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 입구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설픈 고백을 한터라 대답은 듣고 싶었다.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가 나타나지 않고 사탕을 줬으나 돌려 받았다. 그 와중에도 직접적으로 도리 도리 고개질 조차 없어서 오기처럼 대답을 듣고 싶었다. 희망도 없이 당연히 들어야 하는 거절을 그 입으로 듣고 싶었다. '관심 없어' 라고 했던가? 아니면 '싫어'라고 했던가 기억은 잘 나진 않지만 1년 만에 드디어 그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왠지 하늘이 무너져야 하는 느낌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아빠의 88라이트 디럭스를 한까치 뽑아서는 옥상으로 올라 갔다. 눈이 조금 있는 쌓여 있었고 입김인지 담배연기인지 모르게 천천히 피웠다. '쓰읍 후~~~'를 반복하면서 신기하게도 기침 같은건 따끔거리고 쓴 맛이 났고 조금 어지러웠다. 그렇게 시작한 담배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벽에도 귀가 있던 학교를 피해 소위 노는 애들과의 술자리나 하교 후에 몰래 피웠다. 항상 손을 씻었고 목장갑을 끼거나 나무젓가락으로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 담배꽁초를 버린 쓰레기통을 치우던 큰누나에게 걸려 빗자루로 좀 맞았다. 어느날은 내 주머니에 용돈을 넣던 엄마는 담배를 꺼내 들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길래 "뭐? 담배"라고 짧게 대답하고 담배를 뺏어 들고 학교를 갔었다. 늘 피웠기 때문에 몇몇 중요한 사건들 사이로 기억이 난다. 손에 담배가 들려 있던 때는 왠지 쓸쓸함이 있을 때였다.
지연, 학연, 흡연이라고?
고등학교 시절의 흡연은 대단한 동질감을 불러온다. '어? 너도'라는 면죄부를 함께 한다는 것은 이런 저런 친구들과 제법 가까워 지게 했다. 행여라도 권하는 담배에 '응 난 안피워'라는 대답을 하는 놈이 있다면 곧 우리 사이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대학때도 군대에서도 참 좋은 대인용 사교 무기였던 담배는 처음 쉬었던 것은 제대를 2달 앞두고 였다. 왠지 그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대는 나의 흡연을 풍문으로만 들었다.
13년이나 연애를 이어갈지 몰랐다. 애비의 기대에 못 미친 나는 망가진 뭔가가 되어 담배를 피는 것 같았고 그걸 보여 주기 싫었나 보다.
최근엔 '아직도 담배를 피워?'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렇다고 대답했을 때도 끊어라 마라 이런식의 대답이 돌아 오진 않는다. 이별의 위기가 왔을 무렵 운동장 스탠드에서 한숨 쉬듯 피웠고 연락을 끊고 지리산에 갔을 때 도 한 숨 쉬듯 피웠다. 담배는 쓰고 고약한 냄새가 나지만 한 숨 쉬듯 내뿜을 때 그 찰나의 해방감이 좋다.
나쁜 기억을 들이 마셨을 들어온 공기를 폐에서 긁어 꺼내 가는 듯 했다. 그 덕분인지 우리는 기적적으로 헤어지지 않았다.
담배를 많이 피는 건 까뮈 때문이다.
대단한 작품을 하나 쓰고 나서 난 30살이 되기 전에 죽을거라며 생각하며 살았다. 대단한 중2병과 늦은 사춘기의 합병증은 40살이 넘도록 내 주변인들을 힘들게 했다. 와병중에 본 까뮈의 책표지는 관계 지향적인 흡연이 아닌 '후까시'로서의 담배로 발전하게 되었다. 1 학년을 엄청난 학점으로 마무리 하고 난 여기서 더 망가질까봐 아니 사람 구실 못할까봐 불안했다. 하라는 공부는 하기 싫고 학점만 잘 받아도 되는 세상에서 그게 안되었다. 불안의 커질수록 난 담배를 피웠고 병세는 더 깊어져 갔다. 그 세상에선 학점이 필요없으니까 편리했겠지. 용돈도 모자라서 점심 대신 담배를 사 피웠고 그러다 군대를 가니 담배를 공짜로 줬다. 행정병이였고 검열이 한달에 3번은 나왔다. 야근이 많았고 담배를 3갑을 태웠다. 이등병 주제에 저녁이 되면 재떨이를 가져다 놓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용인 되었다. 그리고 담배 친구 믹스 커피를 소개 받았다. 얼레벌레 제대를 하고 졸업을 하고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하면서 또 담배를 많이 피우기 시작했다. 많이 피울땐 4갑도 피웠고 담배값이 올라서 예상 외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88라이트 멘솔이 단종되어서 타임 멘솔을 피우다가 클라우드가 나왔고 입맛에 맞았다. 기관지가 안좋은 집안에서 늘 기침을 달고 살았고 컨디션이 안좋은 날에 폐병 환자처럼 기침을 해 대었다. 야근을 마치고 바에 들러 재떨이에 꽁초를 줄을 세우며 담배를 한갑씩 한자리에서 피웠다. 한 개피 필때마다 미운 새끼 대가리를 씹듯 질겅 질겅 필터를 짖이겨 놨다. 보란듯이 성공해서 식의 복수 같은 것을 읖조리다가 신청곡 몇 곡에 술 몇잔에 또 한숨 같은 연기를 퓨퓨 뱉어 내며 당장 내일 걱정을 했다.
담배로 잃은 건강 인삼으로 되찾는게 담배인삼공사라며 둘러대었다. 혼자 가게에서 술 마실 엄두가 나질 않아 재즈바를 자주 갔다. 아이가 생기고 담배를 끊었다. 아니 좀 오래 쉬었다.
이제는 담배와도 소원해 질 수 있다.
30대 중반 무렵 '난 친구가 없어'라며 디폴트를 선언하게 되었다. 도무지 마음을 나눌수가 없었다. 언제나 내가 연락은 먼저하고 내가 먼저 위해 주고 그렇게 나의 에너지를 쏟고 나면 허무함이 몰려 왔다.
나에게 먼저 연락하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900원 하던 담배를 4,500원으로 올랐어도 피우고 있다. 이젠 가끔 쉬기도 한다. 사람들을 만나서 담배 냄새가 나는 것을 꺼려하고 그대나 혹은 아들이 그 냄새를 맡는 것도 꺼림칙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담배 피는 시간이 즐겁다. 출근을 하면 나는 언제나 홀로 나가서 피운다. 하루에 7~8개피를 피우며 그 소중한 시간을 음미한다. 굳이 담배를 피우면서 유대감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았고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친구들이 있다. 하긴 또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