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인썸니아

by 불은돼지

생일의 오랜 의식 있었다. 아침 조조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좽일 극장에 처 박혀 있었다. 심리학책 몇 권에 자궁이니 뭐니 붙여 보기도 했지만 그냥 잔소리 없이 하루종일 혼자 놀고 싶은 거였다. 생일이니 잔소리도 연락이 끊겨도 다 용서가 되는 날이기 때문에. 이번 생일은 조금 가치 있게 쓰고 싶었다. 마침 지리산 입산통제가 끝났고 산장도 예약이 가능해 졌다. 지난번 산행은 알콜성 치매 탓을 하며 잊어 먹은 척을 했다.쉽게 허락 할것을 알면서도 굳이 생일 선물 핑계를 대었다. 매번 미간을 찌푸리며 허락을 하긴 한다. 그래도 요즘 체력이 한껏 좋아진 탓에 주름 한 두개가 덜어 진것 같긴 했다. 그대에게는 항상 감사하다. 콧등에 바람 스치면 집밖으로 떠 도는 이 역마살도 둔감해질 법도 한데 잊지 않고 아니 항상 처음처럼 걱정을 해주곤 한다.


구례에서 성삼재 가는 버스가 없어졌다기에 다른 교통편을 알아 보았다. 동서울에서 성삼재 가는 마지막 버스가 밤 11시. 그것도 괜찮았다. 어차피 버스에서 자다 깨도 잠을 잘 못잘거라서 산장에 도착하면 소주 두어병 마시면 간만에 푹 잘 수 있을거라는 기대도 했다. 그리고 산장예약은 대기가 걸렸다. 등산 중에서는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 성수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널널한 했는데. 조금 놀랐다. 코로나 덕분에 다들 튀어 나오나....


IMG_0065.jpg 에라 모르겠다 짐이나 싸지 뭐.
KakaoTalk_20220530_134253739_02.jpg 허이차


욕심을 가득 담아 싸다 보니 20kg, 아차 싶어 줄여봐도 18kg 괜찮다. 이정도는. 살빼는 데는 실패했지만 체력은 괜찮은 편이니까. 사무실에 등산화를 두고 와서 또 언젠가 처럼 후임에게 부탁을 했다. 마침 퇴근길이 집을 지나는 길이라 톨게이트 앞에서 받았다.


새로운 아이템이 추가 되었다. 스틱이랑 새버너. 큰 맘 먹고 산 버너는 테스트에서도 훌륭한 성능을 보여줬다. 그래봐 라면 끓이는게 전부지만 작고 가볍다. 10여년을 같이 하던 버너도 생각났다. 참 별게 다 생각나....


지하철을 2시간을 넘게 타고 동서울에 도착했더니 슬슬 어깨가 아파 왔다.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제법 등산객들이 많았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잔 하려다가 참았다. 오는 길에 어떻게 한잔 해봐야지.

KakaoTalk_20220530_134253739_03.jpg 이런 고마운 버스가

버스 안에서는 예상대로 코를 고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불면이 이럴땐 도움이 된다. 음악을 듣다가 조금 졸다가를 반복하다 검은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보니 꽤 빠르게 성삼재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20대 부터 열 댓번을 온 지리산인데 이렇게 사람 많은걸 보는 것도 처음이였다.

산악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 부터 산악회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KakaoTalk_20220530_134253739_04.jpg 노고단 휴게소에서 아침

에너지바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노고단은 5시에 열리기 때문에 일단 패스. 오늘내로 세석산장까지 22km를 가야 된다. 뭐 공룡능선 정도의 난이도는 아니지만 가서 소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세석 평전에서 낙조도 좀 보고....


KakaoTalk_20220530_134253739_09.jpg 연하천 산장에 붙어 있는 글귀

친구새끼랑 왔을때 자던 사설 산장이 국립공원산장이 된지 꽤 되었다. 또 딴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흔들리는 사람 마음을 가지고 위로 받으러 와봐야 어차피 힘든 산행이니까 왠만 하면 오지말라고. 뭐 어쩌겠는가? 힘든 직장도 다니고 힘든 사람도 만나고 그 사이 사이 산장 같은 시간과 사람과 순간들이 있으니 살아갈수 있다. 그냥 그 자리에만 있으면 또 찾게 된다. 산이든, 사람이든.


여명은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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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낙엽들이 눕는 소리가 파도 소리 같았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근육통이 심해지는 반면 마음은 좀 편해진다. 말도 없이 숨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린다. 산악 마라톤 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가느라 꽤나 길을 많이 비켜 서느라 곤두선 신경도 낙엽 따라 같이 누웠다. 걸음 걸음 마다 내속에 뭔가 빠져 나가는 것 같다. 근데 살 너는 왜 안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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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20530_134253739_13.jpg 벽소령에서 새참

이제 절반 쯤 온거 같다. 간식으로 육포를 씹으며 실실 웃었다. 그대에게 전화가 왔다. '괜찮니? 안힘드니? 잠은 좀 잤니?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내려와라. 무리하지말고~~~'를 읊어 대더니 '좋아?' 라고 물었다.

'응 좋아'라고 대답해 줬다. 바쁠것도 없는데 무슨 개인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닌데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체력을 떨어지는데 세석산장 가기 전에 무슨 봉 무슨 봉이 많아서 조금 난이도가 올라간다. 그래도 이걸 넘어야 밥을 먹고 소주를 마실 수 있다. 짧기는 하지만 삶의 목표가 간단해진다. 산에 오는 이유 중 하나다. 걷고 먹고, 자고.

KakaoTalk_20220530_134253739_15.jpg 사진이 별루네

밥을 먹고 정리하고 뭘 좀 끄적이다가 졸음이 밀려와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9시...... 1시간 남짓 잠들었다. 약을 안가지고 온게 후회가 되었다. 어제도 버스에서 잠깐 졸았던게 다여서 좀 힘들었는데.....

잠 들여 보려고 무지 노력을 했다. 그러다 새벽1시가 넘어서 천왕봉 일출 보러 가는 아저씨가 짐을 꾸려 출발했다. 나도 출발할까 라고 고민하다가 몸 상태가 영 아니였다. 그러다 4시가 되고 잠깐 졸기도 전에 5시가 되어서 안되겠다 싶어서 아침 밥을 해 먹었다.


굳이 맨날 천왕봉 찍고 안가도 될것 같았다. 백무동에서 와본것도 한번 밖에 되질 않았다. 중산리가 익숙하지만 오늘은 포기 하기로.

백무동 계곡으로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우 아름다운 계곡이였다. 설악산 비선대 만큼은 아니지만 큰 산이 가지는 스케일이 매우 잘 살아 있고 무엇보다 처음 오는 계곡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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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가파른 내리막이 끝나고 요구조자 대기소라는 벤치에서 30분 동안 꿀잠을 잤다. 사실 내려오면서 반쯤 졸기도 했다. 몽롱했지만 그나마 스틱이 있어 내려올만 했다. 이럴거면 스틱계의 샤넬이라는 레키 스틱을 살걸 하는 후회가 살짝 지나갔다.


굳이 천왕봉을 안찍어도 후회가 되질 않았고 다음엔 다른 코스를 둘러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 전에 이 망할 불면증만 어떻게 한다면. 나 만큼 행복하기도 쉽지 않는데 뭐 때문에 불면증이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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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이 이렇게 생겼었나? 라고 할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10여전 왔을 때의 모습을 전혀 기억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사진 찍는 걸 그렇게도 싫어 했으니.


마침 버스 시간이 20분 남았고 맥주 한캔을 하산주로 마셨다. 동서울 가는 버스는 상쾌하게도 잘 달렸지만 여전히 잠에 들지 못했고 손가방 하나만 가지고 탄 탓에 급 터진 코피에 좀 많이 당황했다. 셔츠 가슴팍과 손과 입은 피 범벅이였고 양말을 벗어서 대충 닦고 막았다.

그래도 도착한 동서울에서는 노숙자가 따로 없었다. 또 여주 가는 버스는 금방 있었다. 어서 돌아 가고 싶었다. 프리지아가 꽃 봉오리가 핀 것 같은 눈 웃음에 가을 소국같이 촘촘하게 눌러서 '갔다왔어?'라고 말하는게 듣고 싶었다.


KakaoTalk_20220530_134253739_21.jpg 작은 놈은 20년, 큰놈은 15년. 또 이게 뭐라고 정이 들어서

오래 된 것을 좋아한다. 이제는 20년이 넘은 지리산을 친구 찾아 가듯이 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나의 가방들은 잘 다녀왔다. 다음 바람이 불때까지 통풍이 잘되는 베란다에서 잘 쉬고 있으렴.

뜻하지 않게 불면과 다녀온 지리산행. 어쩐일로 벌써 다시 가고 싶어 졌다.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내속은 산에 가면 잠잠해 진다. 어쩐일로 발작 주기가 짧아지는 건지 어쩐건지. 이 불면은 또 어쩔건지. 또 모르겠어서 또 가고 싶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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