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문]
"다음 내리실 곳은 연극입니다." 버스 내에서 녹음된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입술을 살포시 다물었다만 이를 꽉 물고 않았다. 버스 바닥에 고정된 의자가 양쪽으로 나란히 줄지어 있다. 천정에 붙어 있는 동그란 손잡이들이 이번에 내리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뒤통수만 보이던 노인 몇 명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이번에 내려라고 눈빛을 보낸다. 나는 빨간색 하차벨을 눌렀다.
중독되기 쉬운 성격을 가진 나는 스마트폰을 되도록이면 안 보려고 한다. 스마트폰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서 그 속에 빠져 들면 어디가 진짜 세상인지 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 몸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하고 있는 것 또한 스마트 폰인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나의 바람일지도 모를 알고리즘이 나에게 연극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어린이만큼 왕성한 나의 호기심은 결국 대명동 연극단이 모여있는 어느 극단의 오디션장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연극은 어떤 것일까?라는 호기심보다 더 한 연극을 체험해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게 올라탄 버스를 타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들었다. 지금 이걸 하는 게 맞는 걸까? 꼭 해 봐야 하는 걸까?라는 고민은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로 잠이 들게 했다.
버스기사의 옆에 자동으로 열리는 문이 "푸시웅~"거리며 열렸다. 부채질을 하며 올라 탄 어린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였으며 부채질하던 책받침은 심형래의 '우뢰매'의 영화포스터 사진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버스가 가는 오른쪽 창문을 까치발을 들어가며 버스가 멈출 때마다 거리를 두리번 거린다. 버스가 출발하고 가로수에 가려진 '우뢰매 절찬상영 중'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망설이다가 내린 정류장. 건너편에 주유소가 보인다. 주유소 건물 안쪽인 듯 스마트폰으로 안내해 주는 길을 보고 확인했다. 주유소를 차가 없이 걸어 들어가 뒤쪽 건물 입구에 다다르니 보이는 입간판. '연극'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5층으로 올라오시오.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진심 어린 연극이 아닐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계단 하나하나가 무겁기만 했다. 5층인가? 반쯤 열려 있는 문에 하얀색 변기가 보인다. 화장실문이 먼저 보이고 오른쪽에 있는 닫혀있는 문에게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돌리려다가 다시 손을 뗀다. 머리 위에 있던 헤드폰을 목으로 내리고 화장실 거울을 보며 또렷한 눈빛을 한번 쏘아주며 다시 손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문안에 또 다른 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먼저 오신 분의 인터뷰가 아직 진행 중이라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편하게 있으라 한다. 앉지 않고 이것저것 서성이며 주변을 살핀다. 유리문으로 서성이는 내 눈과 마주친 사람이 무뚜뚝하게 응시한다. 앉아 있는 것보다 이렇게 서있는 게 편하다고요.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밖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 놓인 재떨이를 보며 담배하나 피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담배하나 피우면 딱 좋긴 하지만 참아야 했다. 담배를 끊었잖아. 머릿속에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에서 애써도 나오지 않은 소변은 찔끔거리며 바지를 내린 수고에 대한 보답을 하는 듯했다. 다시 문을 열었다. 유리문에서 보이는 무뚜뚝한 표정의 사내가 나를 보고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나를 안내하던 검은 안경테를 끼고 어색한 미소를 보이던 젊은 청년은 앉을자리를 손짓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입을 닫고 옆에 앉은 두 명의 사내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반응한다. 무뚜뚝한 표정의 사내 옆에 앉은 파마를 한 동네 치킨집 사장님과 닮은 사람은 나를 보며 웃으며 말한다. 프로필을 보니 저하고 동갑이시던데 어떻게 이 나이에...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인터뷰는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묻고 답해드리고 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질문은 하지 않겠다. 스스로 질문을 찾아야 하고 답을 구해야 하는가 보다. 나를 소개한 적이 언제였던가. 쑥쑤럽다기 보단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중에 무뚜뚝한 표정의 사내가 말을 툭하고 던진다. "왜? 하시려는 겁니까?" 무뚜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기 싫어 고개를 애써 돌리지 않았었는데 잠깐 멈춘 후 짧게 말을 잇는다. "연극".
스마트폰을 보다가 이렇게 흘러들어오게 된 사연을 말했다. 그저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하시고 계시는 당신들은 왜? 연극을 하십니까?라고 묻고 싶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질문했다.
"연극해서 행복하십니까?"
대답은 그저 그런 뻔한 대답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고 인생을 즐기고 싶었는데 연극을 하고 나니 내 삶의 활력소가 되어 연극을 하기 전보다는 행복한 것 같다고 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른 걸 했어도 행복했을 것 같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때쯤. 다음 주 전체 회식이 있는데 오실 수 있냐고 한다. 합격입니까? 라며 갑자기 올라간 내 목소리에 모두가 웃으며 아마도 그럴 겁니다.라는 말을 하며 최종적으로 합격여부를 형식적으로 하겠지만 오시면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인터뷰는 끝이 났고 나는 닫혀있던 문을 열고 계단을 가볍게 내려갔다.
버스를 기다리며 연극대본은 어떻게 쓰는 걸까. 대사가 이어지면 되는 건가? 궁금했다. 쓰고 싶었다. 버스 뒷자리에서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며 연극을 상상하며 대본을 써 본다.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만족의 웃음이 지어진다. 내 연극이 올라가는 날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너무 재밌었다.
문이 열렸지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탈 공간은 없다. 버스기사는 손을 뻗어 버스비를 받고 뒷문을 열어주며 큰소리로 지른다. "뒷문으로 타세요. 앞에 계신 분들은 뒤로 좀 이동해 주세요." 교복을 입은 나는 뒷문에 가까스로 왼발을 먼저 올렸고 손잡이를 잡고 어깨로 엉덩이로 밀어가며 가까스로 버스를 탔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 버스. 봉에 붙어 있던 손을 빼서 뒤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손이 끼었다. 내 손아귀에 물컹한 게 느껴진다. 눈이 커지고 꼼짝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힘을 주지도 않고 그대로 손을 내버려 뒀다. '이건 가슴일 거야.' '아! 분명 여자의 가슴일 거야.' 엄마의 가슴을 만지며 잠들던 어린아이는 10년이 지났어도 여자의 가슴이 어떤지 알고 있다. 꽉 껴 버렸어. 많은 사람들이 밀고 밀치고 하는 중에 내 손이 여자가슴에 꽉 껴 버린 거야. 얼굴이 빨개졌을 텐데 들킬까 봐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다음 정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그리고 내 손에 있던 가슴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단발머리의 우람한 아저씨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눈을 떴다.
다음 내리실 곳은 어디일까? 항상 알려준다. 어디를 가려고 탔으니 어디를 가고 있으니 어디를 가면 문이 열려 타고 문이 열려 내리고 같이 타고 가는 사람은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허벅지와 어깨가 맞닿는 게 싫을 뿐이다.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내가 보는 스마트폰을 훔쳐보는 것 같아 신경 쓰일 뿐이다. 같이 가고는 있지만 서로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오래전 텔레비전에 나오던 광고에 이런 말이 유행한 적 있었다. "저 이번에 내려요?" 수줍게 고백하는 장면이 낭만적이었는데 지금은 '띡'하고 접촉만 하면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하는 소리만 들릴뿐이다. 문이 열린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려야 열린다. 문은 나에게 스스로 열어 주지 않는다. 문은 내가 열어야 한다. 닫혀 있는 문도 나는 열 수 있다. 그리고 닫을 수도 있다.
문자가 왔다. '인터뷰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극단과 맞지 않아 가입은 안되십니다.' 탈락을 시켰지만 우린 참 착한 사람들 이서 이렇게 매너 있게 기분 안 상하게 문자를 보내드립니다.라고 하는 것 같다. 다음 주에 오라고 했던 말은 뭘까? 문을 열었는데 안에 있던 유리문은 내가 열 수가 없었던 것인가. 무뚜뚝한 표정의 사내가 떠오른다. 나를 분명 탈락시킨 감독일 거야. 연극은 호기심에 한번 쩝쩝대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라고 하는 것 같다. 문을 닫았다. 유리문은 내가 열 수도 닫지도 않았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것이다. 우람한 근육을 한 아저씨의 가슴처럼 나는 잠시 연극대본을 쓴 행복을 맛본 것이다. 우뢰매 책받침을 들고 끝내 보지 못한 우뢰매는 언제나 나를 목마르게 했다. 영화와 연극처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공상이 가득했다. 버스는 멈췄고 내려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낮은 문. 열리긴 하는 걸까? 열려본 적 없는 문이 보인다. 허리를 숙이고 구부정하게 들어가야 들어갈 수 있는 문. 손을 뻗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면 문은 사라진다. 그저 다른 세상이 있거나 어둠만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