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매트 리들리 VS 미국의 마이클 셔머
“자,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여왕이 말했다 – 거울 나라 앨리스 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의 본명은 찰스 도지슨이고, 그는 옥스퍼드대학의 수학교수였다. 그는 수학, 물리학, 심리학, 그리고 생물학까지 넘나들며 이상한 나라(wonderland)를 그려냈고, 그 후 많은 과학자들이 원더랜드 속에서 영감을 받아 연구를 해왔다.
그중 생물학계에게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붉은 여왕 가설’이다. 진화를 움직이는 체스판에 비유한 이 가설은 끊임없는 진화 경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1973년 미국 시카고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리밴 베일런이 ‘새로운 진화 법칙’이란 논문을 발표하며 알려졌다.
하지만 이 가설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붉은 여왕(RED QUEEN)』이란 책을 쓴 매트 리들리이다.
1995년 출간된 『붉은 여왕(RED QUEEN)』은 인간이 성과 진화에 숨겨진 비밀이란 부재로, 붉은 여왕 가설을 통해 성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동물 세계의 다양한 성 선택의 예시와 함께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들이 담겨 있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리들리는 옥스퍼드대학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코노미스트> 과학전문기자로,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칼럼니스트 활동으로, 진화생물학, 생명과학, 인류학, 사회학 등 과학과 인문사회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한 세계적인 저술가이다.
『붉은 여왕(RED QUEEN)』을 시작으로 뉴욕 타임즈가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게놈GENOME』, 미국학술원 과학도서상을 수상한 『본성과 양육 NATURE VIA NURTURE』 그리고, 번영의 진화를 살핀 문명 비평서 『이성적 낙관주의자(THE RATIONAL OPTIMIST)』 까지. 출간하는 책마다 화제의 명저가 되고 있다.
또한 경제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성공한 사업가의 경력도 가지고 있고, 영국의 귀족 집안 출신이라 자작(Viscount)이란 명예도 지니고 있다. 돈과 명예 그리고 지식을 모두 갖춘 ‘퍼펙트 젠틀맨(Perfect Gentleman)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최근 저서인 『이성적 낙관주의자(THE RATIONAL OPTIMIST)』를 보면, 그가 보는 세계관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인류를 번영시킨 원동력을 ‘전문화와 교환 (specialization and exchange)’ 두 가지로 요약한다. 물품을 교환하고 그 생산을 전문화하면서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이다.
번영은 변화를 필요충분조건으로 끌어안고 달리고 있다. 성공한 모든 것은 패배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으며, 세상은 ‘갈등’과 ‘협동’ 이란 노를 저으며 진보적으로 번영한다. 리들리는 ‘과학적 이성은 낙관주의를 선택했다’며 우리를 달콤한 진보의 나라, 과학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 속에서 느끼는 시간의 압박과 과열 경쟁, 상대적 행복 또는 불행은 어쩔 수 없는 피로감일까?
리들리의 조언대로 진화라는 거시적 안목과 과학적 이성을 장착한 낙관주의를 가져본다면 어떨까? 그런 낙관주의로 우리는 하루를 조금 더 잘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더 빨리 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어딘가로 진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에 의해 좀 더 영향을 받고, 흥분하게 되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하고 영원한 오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사회심리학자 토머스 길로비치(Tomas Gilovich)는 확증적인 정보에 지나치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불리한 정보를 무시해버리는 쪽이 편안하기 때문이라며 ‘편향 확증(confirmation bias)’이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자신의 신념에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인다. 마치 눈을 뜨고 있지만 이성의 눈은 감아버린 형국이랄까.
무지와 미신, 음모, 신비주의, 사이비 과학이 판치는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제발 정신 차리고 살라며 호소하는 과학자가 있다. 바로, 마이클 셔머이다.
그는 1992년 스켑틱(Skeptic)이란 과학잡지를 창간해 현재까지 발행하며, 과학적 회의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래너드 서스킨드 등 세계의 지성들이 모인 스켑틱 협회는 과학이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또한 행동하는 과학 저술가 셔머는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믿음의 탄생』 등의 저술을 통해 비이성적 태도를 꼬집고, 종교와 사이비 과학의 증거들을 의심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최근에 그는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을 통탄하며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헛소리 검출기(Baloney Detection kit)>를 공개하기도 했다. 빠르고 재밌고 명쾌한 그의 화술이 돋보이는 이 동영상에는 헛소리를 검출하는 열 가지 방법이 들어있다. 이대로 실천한다면 누구나 과학적 회의주의를 실행할 수 있을 것 같다.
1. 얼마나 믿을 만한 증거가 있나?
2. 원전도 비슷한 소리를 하는가?
3. 그 주장이 타인에 의해 증명되었나?
4. 이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랑 맞나?
5. 누군가 이것을 반증하려 노력했나?
6. 어느 곳이 더 수적으로 많은 증거를 가졌나?
7. 주장자가 과학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나?
8. 주장자가 그들 편에서 유리한 증거만 제시하거나 다른 이론을 위한 증거를 부정하지는 않나?
9. 새로운 이론이 구이론만큼이나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나?
10. 개인적 믿음, 이념, 세계관이 주장을 유도하나?
이 10가지 의문은 편향 확증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두뇌를 자극하며,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길을 만든다.
약 400년 전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의 시대를 열었을 때의 철학적 태도가 ‘방법적 회의’였던 것을 알고 있었다. 증거를 모으고 그것들을 비교하고 유력한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해 또다시 끊임없이 의심하는 회의주의는 과학을 하는 기본자세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더구나 과학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최선의 도구라는 셔머의 생각에도 동의한다.
그런데 왜 나는(혹은 우리는) 그동안 회의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을까?
칙칙한 회색으로 색칠해 마땅한 어두운 그림자처럼 혹은 긍정과 희망의 반대 측 어딘가 구석으로 밀어 넣고 싶은 검은 비닐봉지처럼, 물론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은 기피대상처럼 말이다.
아마도 진실함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게으름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수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쪽에 속해 의심하지 않은 편이 더 안전하고 안락하다고 느껴서는 아니었을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온몸에 눈이 백 개 달린 아르고스처럼 온몸으로 이성의 촉을 세우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리라 유난스레 다짐해본다.
우리 인간에게는 과학이라는 눈이 있다.
참고) 헛소리 검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