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꾸미Cumi Aug 22. 2020

막내딸 기억법

‘이젠 사랑할 수 있다’를 낭독하며...

규백은 책 두 권을 낸 작가였다. 

제목은 ‘이젠 사랑할 수 있다’ 와 ‘시간의 얼굴’. 두 권 모두 작가자신의 경험과 기억들 그리고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한 에세이였다. 


하지만 막내딸인 그녀는 엄마의 책을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60대에 시작한 엄마의 글쓰기 행위가 대단하다고 경탄했지만,  엄마의 글에 대해서는 약간 비아냥 적인, 밑으로 깔아보는 시선이 있었다. 


가끔 어이없이 틀리는 맞춤법. ‘질투를 느꼈읍니다’, ‘찌게를 끌이고’ ‘황혼 에’ 등등 같은 것들을 보면, 초딩수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워낙 노벨상 수상 작가의 책이라든가 고전에 반열에 든 책을 우선시하는 허영심 가득찬 독자라서, 규백이 쓴 글의 품질은 객관적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주관적으로는 낯간지러운 면도 있었다. ‘뭐 이런 거까지 쓰고 그러지?’

어르신들에게 수필이라는 장르는 자신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삼아 인생을 정리하는 방법론 정도로 여겼다. 


규백과 함께 글을 쓰는 문우들은 대부분 60, 70대의 여성들로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살았다기 보다, 남편이나 자식들을 받쳐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숨은 조역들이었다. 느지막하게라도 자신을 세상에 중심에 놓고 글을 쓰는 것이 그 자체로 행복해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규백이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일종의 '실용주의'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의 퀄리티보다 예술 활동을 함으로써 얻는 효과와 이득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고 말이다. 


보통의 알뜰한 여인들은 보다 혜택이 많은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엄마표 실속파 실용주의의 습성을 갖는다. 더 싸고 많이 주는 상품을 노골적으로 선호하는 모습은 ‘아줌마스러움’ 이란 다소 혐오적인 표현으로 회자된다. 일정이 빡빡한 패키지여행을 하면서도 ‘이거 다 돈 낸 거니까 다 봐야 돼’ 라고 하며, 힘겨움을 의당 누려야할 권리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규백은 아주 전형적으로 실용적인 캐릭터였다. 자식들에게 ‘엄마 얘기 들으면 손해보지 않는다’ 라는 조건문를 만들어 모든 상황에 적용시키려 했으며, 그녀의 말대로 그 가설은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뉴튼의 법칙만큼 확실한 엄마의 진리이었다. 


그녀는 엄마가 그렇게 ‘손해 보지 않는’ ‘실속 있는’ 글쓰기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해 꽃다발과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즐거운 노년을 보낸다고 생각했다. 문우들과 출판기념회에 간답시고 지방에 자주 다니고, 전국 문학관 기행을 다니는 모습에, 규백이 ‘작가’라는 호칭을 얻어 달콤한 세속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여겼다.


그녀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에, 나무 상자 속에서 수의를 입고 누운 시신의 발밑에 수필집 두 권을 놓아주었다. ‘문학인’로서 규백은 자신이 쓴 책과 함께 재가 되었다. 

다른 가족들은 미처 규백이 쓴 책을 관 속에 넣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내딸이  엄마의 마지막 길에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들 칭찬했다. 


그녀는 사람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보여 지는 모습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모습은 시신이 된지  이틀 째 입관한 모습이었다. 전에는 이해가지 않았던, 왜들 자신의 수의를 장만하는데 신경을 쓰는지에 대해 납득이 되었다. 단 몇 분의 장례 절차이지만, 입관식은 가장 장렬하고 숭고하다. 하얀 수의를 입고 관 속에 누운 모습은 망자를 떠올릴 때 가장 최신의 강렬한 기억이 된다. 진정 ‘마지막 장면’ 인 것이다.  


예쁘게 단장된 규백의 얼굴은 건강해 보였고,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곧 벌떡 일어나 왜들 법석이냐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마지막 얼굴이 초라하지 않고 고와서, 하늘나라와 어울릴 것 같았다. 규백이 자신이 쓴 수필집을 들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하니, 보는 가족들 또한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규백의 수필집은 잊혀졌다. 




일 년 뒤, 막내딸은 규백의 책을 꺼내들었다.

‘애도하는 사람’의 영향으로 애도의 방식을 바꾸기로 마음먹고는, 규백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감사하고 감사하는 일들’에 대해 찾아보고 싶었다. 책 속에는 그런 실마리들이 가득 할 테니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엄마의 목소리가 된 듯, 책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자, 극장의 커튼이 올라가고, 수필을 쓰던 규백의 모습과 그 당시 일들이 상연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낭독을 멈추기 싫었다. 이런 김에 '오디오 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거의 전편의 수필을 녹음한 뒤, 규백의 첫 번째 제삿날, 가족들에게 오디오 파일을 공개했다. 


다른 가족들은 입관을 한 그날처럼, 미처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막내딸이 엄마를 생각하는 것이 남다르다며 칭찬했다. 


그녀는 수필집을 주의 깊게 낭독하면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세심히 고심하는 규백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엄마의 글쓰기에 대해 잘못 오해하고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필 쓰기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규백은 문학을 ‘늦게 만난 애인’이라 칭하며,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고백한다. “수필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했던 내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존재로서 남은 삶을 애인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87p)”고 기뻐했다. 


하지만 계속된 글쓰기 속에서 불면의 밤들이 찾아왔고, 어리석게 덤빈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으며, 자신보다 어린 문우들에게 받은 세밀한 지적은 견딜 수 없는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대로 깨끗이 포기할 것인가?’  


희망과 용기를 주던 애인인줄만 알았던 문학은 규백을 달달 볶으며, 지치게 했다. 자신이 한심스러워 넉 다운 된 어느 밤, 규백은 벌떡 일어났다. 


" 강해져야 한다잠이 오지 않으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

                                                                                    (89p, 이젠 사랑할 수 있다. 문학관books. 2005 출간)

     

그 후, K선생님이 지적해준 원고를 찾아 퇴고하고, 다듬기를 반복한다. 


“문학성이 없더라도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반듯하게 있으며 재미가 없다’ 라는 김기창 화백의 말씀처럼. 흠이 있는 미완성에서 끝없이 완성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이 더 보람이 있지 않을까. 스스로 위로해 본다. (89p)


이렇게 규백의 글에서 아픔과 겸손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늘 자신감이 없는 성향의 사람이었지. 그러한 태도가 글 속에서 어눌해 보이는 듯하지만, 어떠한 척하는 기교 없이 그 자체로 솔직하고 겸허함으로 묻어나는 구나. "


규백은 내면의 침몰 속에서, 자신의 단어를 건져내 바람에 말리고 수선하면서, 한 줄 한 줄  문장을 만들었고, 그렇게 앞으로 조금 씩 전진했다. 조금 흠이 있더라도 의미를 부여했고, 그러한 과정을 겪고 난 후에야 그녀는 수필가로 이름을 얻은 것뿐이었다.


저자 이규백 : 충난 천안  출생. '한국문인' 으로 등단. 한국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입협회 회원. 


규백은 글쓰기를 통해 고독과 고통 그리고 행복을 얻었으나, 이것이 작가로서 허영심을 채우거나, 어떤 실속을 차리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마음의 상처와 치유되지 못한 채 남게된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딸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규백이 문우들과 몰려다니며 문학모임을 하는 것에 더 신이 나 보인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녀는 고인이 된 작가의 책을 읽고 나서야, 자신이 엄마의 글을 세속적으로 폄하했던 것이 부끄러워 눈물이 났다. 보통의 작가보다 인터넷 활용 능력이 떨어질 텐데도 규백의 글에는 역사문화적, 인문학적 인용이 가득했다. 희귀한 옛말들의 고풍스런 사용이나, 꽃이름 나무이름을 모두 다 꾀고 있으면서 자연을 묘사하는 부분은 실로 놀라웠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규백이 작가라는 이름을 얻어 지적허영과 문화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글쓰기를 활용한다고 생각했을까?  제대로 읽지도 않고 무시했던가? 


그녀는 정말 멍청했던 것이다

가족들도 다같이 정말 멍청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규백이 책을 남긴 것에 대해 또 다른 가치를 알게 되었다.


수필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사랑하고, 감사를 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느낄 수 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이다. 

즉, ‘수필은 작가와 독자가 혼연일체를 이루며 인간의 진실을 규명하기에 적합한 인간학 ’인 것이다. 문학의 존재이유가 인간과 삶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면, 수필은 그 목적에 가장 근접한 문학의 장르인 것이다.  (90p)


" 기쁨과 환희가 담긴 사진 백장보다 외롭고 차가운 고독 속에서 진통을 겪으며
쓰인 수필 몇 장이 그 사람의 진실을 드러내줄 수 있지 않을까? "


“기쁨이나 행복은 나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내게로 와서 느낄 수 있지만, 고독은 순수하게 나로부터 시작되고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나만의 재산이 된다. 우리는 고독으로 인해서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21p)   


모든 사람이 자신의 수필을 남길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남겨진 사람들이 먼저 떠난 사람을 기리고 기억하고 애도하는데 좀더 쉬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동안의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진실이 담긴 글이라면 더욱 의미 있겠다. 

사람에게 삶은 한 번 살고 가는 일회용이지만, 글로 남겨진 이야기는 영원하다, 기억으로 계속 이어지는 한.....


그녀는 자신도 규백을 따라 에세이를 써보기로 작정한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골똘히 음미하는 것. 그 과정에서 얻은 진실을 담아내는 것.   


규백보다 잘 할 자신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이 없는 애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