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어느 순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만나다

모자이크형 인간 09

by 금인어

나는 헤르만 헤세의 글을 좋아한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고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 쓰기 보다는

무엇이 될지 몰라서 쓰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의 길은 한 곳에 몰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분명한 지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얀 색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곰, 나무, 집, 무용가, 운동선수, 축구 등 어떤 뚜렷한 주제와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북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도구를 선택하는 것조차 나는 어려웠다. 연필, 볼펜, 붓, 색연필, 크레용 중에서 무엇이 내 그림에 적합한지 찾다가 점이나 선으로 시작한 그림을 서로 이어보거나 혹은 남들이 그리는 곰, 나무, 집, 무용가, 운동선수, 축구 등을 아주 서툴게 아주 미미하게 그려본 뒤에야 전체 작품이 무슨 주제와 연결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을 그릴지 몰라도 일단 붓을 드는 동작을 하는 것처럼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도 일단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작가라는 구체적인 모습이 나의 꿈으로 분명해지기까지는 많은 경험과 방황의 시간들이 필요했다. ‘작가’라는 두 단어에 마음이 설레고 흔들린 시점을 되짚어 보면 블랙홀과 같은 고민과 방황 속에 놓여있던 20대 초반의 어느 여름이다. 끊임없이 솟아나와 나를 누르는 많은 생각들에 주체할 수 없이 힘들었고 번민과 생각의 무게에 쓰러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내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답답함’이라는 병이 결국 몸의 병으로 드러났다. 어지러워 몇 시간 동안 누워있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내 삶의 길을 어떻게 걸어 가야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삶의 가장 원초적인 곳까지 파고드는 철학자와 같은 질문이 아니더라도 ‘갑자기 닥친 가정의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나는 어떻게 극복해가야 하는지’, ‘하지만 힘이 없다’, ‘한 발짝 내딛을 힘조차 내게는 남아있지 않다’와 같은 좌절된 현실의 어려움과 함께 슬픔과 가슴 아픔이 겹쳐졌다. 생각을 적는 일이 지친 심신의 병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펜과 종이에 그저 가슴 속에 알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에너지와 생각 느낌들을 적거나 자판을 마구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동안 내 안에 고여 있다가 배설해달라고 아우성치는 느낌이었다.


청소년시절부터 분출하지 못하고 억압했던 에너지는 ‘뛰어오르고 싶다’, ‘멋지게 춤을 추고 싶다’, ‘예술가처럼 한없이 낭만적인 감성에 빠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시지옥에 갇혀 억압됐던 에너지들이 뭔가 살길을 찾고 싶어 했지만 어떤 방법도 길도 알지 못했다. 이런 내 마음에도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사람은 고통과 절망의 맞은편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생명의 길을 개척 한다.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전해주는 문장들은 나에게 생명수와 같았다. 그의 작품 ‘데미안’, ‘지와 사랑’, 그리고 ‘싯다르타’에 이르기까지 한 문장 한 문장 몰입해서 읽었다. 나의 모든 충격과 두려움 그리고 어른 세계 사회에 나아가기 전에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괴리감과 상처들을 치유해주는 글이었다. 나를 괴롭힌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보다는 헤르만 헤세처럼 느낌들을 존중하고 문학으로 탄생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서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생명을 찾는 거 같은 감동을 느꼈다.



‘나의 고뇌가 쓸데없는 번민과 번뇌 망상이 아니구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다시 일어나 똑바로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내 안의 수줍고 못난 어린 소녀의 자신 없음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한다. 주춤하며 어설픈 싸움에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분노를 폭발하지 못해 변형된다. 시간과 에너지를 탓하지만 이제는 집중하고 싶다. 새벽에 저절로 깨서 나를 이끌게 하는 그런 싱그러운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