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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호기 Oct 28. 2016

영화 <걸어도 걸어도> 에서 ‘가족’ 읽기

담담하고도 섬세한, 가족에 대한 초상화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스타일과 작품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작품.

  가족에 대한 담담하고도 섬세한 묘사로 꽉 찬 묵직한 영화.




  가족 혹은 식구로 정의되는 구성원들은 식탁이라는 공간에 모이는 강력한 구심력을 가지고 있어서 집이라는 공간과 고향이라는 영역에 자꾸만 머물게 되면서도 자꾸만 그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가려 하고 숙명적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가족은 강력하게 결집되는 동시에 자꾸만 해체되려고 한다.


  어느덧 10년째, 큰 형 준페이의 기일에 식탁으로 모이는 료타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지닌 단단한 가장 쿄헤이와 그것에 대한 직설적인 반항으로 오랜 시간 응결된 막내아들 료타의 갈등을 중심으로 아슬아슬한 긴장의 선이 이어진다. 료타의 가족은 오래된 집과 식탁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며 해가 뜨고 다시 질 때까지 해체와 결합을 반복한다.


상실과 결합이라는 상처와 회복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가족. 식탁은 그들을 다시 모으고, 그 중심에는 어머니 토시코가 있다.


  가족은 시간을 먹고 자라는 거대한 생명체 같아서 그것은 자꾸만 자꾸만 앞으로 걸어 나아간다. 빈자리를 누군가가 채워나가고 계절에 따라 다른 얼굴로 낡아가며 동시에 새로워진다. 가족의 텅 빈 상처에는 역설적이게도 강력한 중력이 생긴다. 그리고는 그 빈 공간을 향해 새로운 누군가가 강하게 끌려들어 온다. 그 빈 공간에서 마주한 새로운 존재들은 서로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위로하고 위안받는다.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료타의 큰 형 준페이. 그의 가족은 채울 길 없는 거대한 상처를 얻었지만, 그로부터 10년이 되는 이날 료타는 새로운 식구인 유카리와 그녀의 아들을 식탁 앞에서 소개한다. 어머니 토시코는 남편과 사별한 데다가 아들까지 키우고 있는 유카리에 대해 탐탁지 않지만 이내 치유와 봉합의 공간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새로운 식구에 대한 희망과 질투를 동시에 표한다.


  사실 료타의 식구가 된 유카리와 그녀의 아들 또한 남편이자 아버지를 상실한 존재들이다. 비극적인 가족의 해체를 경험한 두 가족은 다른 듯 닮은 상처로 서로 공감하고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큰 형 준페이의 묘 앞에서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며, 새로운 얼굴을 하고 새로운 가족의 삶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그들은 다시 먼 길을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


형의 자리는 빈 공간이 되었지만 동생은 새로운 존재들로 그 공간을 채운다. 이 과정엔 필시 저항과 마찰이 따른다.


  가족은 매우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다양한 표정들이 우연히 발견된 역사책처럼 잠들어 있다. 오래전 남편 쿄헤이의 외도를 생생히 기억해내는 엄마의 속상함. 큰 아들의 목숨을 갈음한 어느 보잘것없는 젊은이에 대한 가족 공동의 애증. 제대로 된 어른의 모습을 기대하는 아버지와 그것에 저항하는 막내아들 사이의 냉전. 이들의 다양한 표정은 식사를 하는 내내, 작은 욕조에 몸을 누이는 내내, 떨어진 욕실 타일 조각처럼 매우 소소하지만 아무도 고쳐주지는 않는 그런 상태로 영원히 기억되며, 방구석에 보관된 오래된 레코드 음반처럼 때때로 누군가에 의해 방안 가득 울려 퍼진다.


  사실 가족은 가족이라는 거대한 공통점 외에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다. 낯선 타인보다도 싫어할만한 이유가 더 많은 대상들이다. 애정과 증오가 복잡하게 뒤섞이며 밀가루 반죽처럼 모양을 이룰 때 그것은 그럴싸한 반죽이 되어 고소한 옥수수튀김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빚어낸 똥의 모양이 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가족은 야속하게도 우리의 곁에서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지고 만다. 가족은 꼭 죽어버리고야 만다.


가족은 서로를 마주보지 않고도 가슴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런 대상이 또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나 자신뿐.


  가족 상실. 그것은 가족을 구성하는 오래된 원리와 관계를 뒤흔들며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해준다. 근엄한 가장의 뜻을 잘 이해했던 큰 형 준페이를 중심으로 양 대척점에서 갈등했던 아버지 쿄헤이와 막내아들 료타. 그 갈등의 원인이자 해소점이었던 큰 형의 상실을 통해 두 존재는 서로를 직면하게 되고,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또 한 번의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런 것들은 '항상 너무 늦는다는 것'

 

  가족상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의 숙명이자 불현듯 상상하게 되는 현재의 고통이며 이미 오랜 나의 가족들이 대를 물려가며 반복해온 과거의 사실이자 빗나가지 않는 불행한 예언이다. 가족상실의 고통은 너무나도 커서 실존의 대상이 아닌 대상에 그 상실의 대상을 투영시키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가족사진일 수도 있고, 형의 기일에 방 안으로 날아들어온 하얀 나비일 수도 있다.


죽은 형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바다. 매우 현실적인 해변은 지독한 일상의 모습에 가깝다.


  가족상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가족의 붕괴이자 해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걷고 걸을 수밖에 없다. 상실의 공간을 마주하러 가는 길도 걸음뿐이고 그곳에서 현실로 되돌아오는 길도 걸음뿐이다. 지름길은 없다. 단지 멀리 돌아가는 길 뿐이다. 가족은 매 계절 새로운 얼굴을 하고 그 길을 걷고 걷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면 '엄마의 비밀을 알게되었다'는 포스터의 문구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비슷한 색의 다른 영화 :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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