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자신과 홍상수의 것
습관적으로 홍상수 영화를 매년 봐온 사람들. 그의 신작에 김민희가 어떻게 묻어 나올지 궁금하다면.
(영화 줄거리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 연인으로 보이는 민정과 영수. 영수는 지인에게서 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다닌다는 것. 토라져 있던 영수는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오르는 민정에게 사실을 묻는다. 아니라고 말하는 민정과 끝까지 맞다고 주장하는 영수. 두 사람은 서로 아득한 소리를 내지르다 결국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한다. 홍상수 감독의 23번째 영화는 자신을 함부로 규정하려 드는 타인과 그것으로부터 주체성을 찾으려는 자기 자신의 대립이 이야기의 흐름을 이끈다.
민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함부로 정의하려는 타인들에 계속해서 저항하지만 영수는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영수는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민정을 몰아세운다. 다수의 타인이 자기 자신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편집해 나가는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갈등을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하며 그 폭력성을 부각한다.
결국 옷을 갖추고 영수의 좁은 방을 나서는 여자 민정. 홍상수 영화에서 늘 그렇듯 남자 영수는 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한다. 홍상수 영화의 백미인 '찌질함'의 시작이다. 거기에 더해 갑자기 깁스를 하고 나타난 영수는 목발을 짚고 민정이 일했던 가게와 집 앞을 서성이며 민정을 찾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목발에 의지해 더디게 딛는 걸음으로는 민정의 실체에 접근하기 벅차다.
영수가 연남동 곳곳에서 허탕을 치며 처절한 후회를 하는 사이, 민정은 그녀만의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곳에도 새로운 타인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모두 민정과 아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들. 그들 역시 민정과의 관계와 경험을 설정하고 기억해내며 그녀를 정의하려 든다. 여기서 영화는 '호명이론'의 한계성을 시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L. Althusser)의 호명이론에 의하면 ‘나’는 외부의 호명에 대응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지하게 된다. 알튀세는 경찰과 행인을 예로 들었다. 경찰이 행인에게 '어이 거기!'라고 호명했을 때 행인이 그 명에 응해 돌아본다면 그 순간 행인은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주체를 형성하고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호명에 저항하거나 부정한다면 행인은 정반대의 혹은 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주체가 된다. 이처럼 호명이론은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는 자기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호명'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영수의 좁은 방에서 벗어난 민정은 호명이론과 타인의 폭력성에 저항하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려 드는 타인들에 맞선다. 그러기 위해 민정은 타인을 부정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타인화한다. 자신은 민정이가 아니라 민정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면서 과거부터 쌓여온 민정에 대한 기억과 정의를 모두 백지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당당히 주장하는 민정 (혹은 민정의 쌍둥이 동생) 앞에서 타인들은 관계의 주도권을 잃는다. 그리고 민정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설정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시작한다. 다소 엉뚱하고 황당할 수 있는 영화적 설정일 수 있지만, 민정이 카페에서 보고 있던 책을 보면 이 과정은 보다 선명하게 의미를 드러낸다.
민정이 읽고 있던 책은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 문학작품인 카프카의 단편집이다. 물론 카프카의 많은 단편들 중 특정 작품이 화면에 부각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카프카의 대표작인 <변신>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워낙 해석이 다양한 소설이지만 간단히 이야기를 줄여놓자면 이렇다. 주인공인 그레고르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다.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의 사회적인 위치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민하고 자신의 방을 나서지 못한다. 여기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존'이 아니라 한 부모의 아들이자 어느 회사의 직장인으로서의 자신 즉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존재'이다. 결국 그레고르는 사회로 복귀하지 못하고 타인이 던진 사과에 의해 벌레의 몸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갑자기 벌레가 된 그레고르와 민정의 쌍둥이 동생이 된(것으로 주장하는) 민정은 서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리고 타인들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존을 대면하게 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변신>과 이 영화는 맥이 닿아있다. 다만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방 안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그레고르와 달리 민정은 좁은 방 밖으로 뛰쳐나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존에 접근한다. 수많은 타인들과의 관계로 둘러싸인 사회의 틀 안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설정해나가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 이 영화가 지닌 매우 직설적인 메시지다.
그녀의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 일들 중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는 영화의 끝까지 알 수 없다. 민정이 정말 영수와의 약속을 어기고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시며 다닌 것인지, 민정이 아닌 민정의 쌍둥이가 그랬던 것인지 관객들은 물론 민정을 열심히 쫓아다닌 남자들도 알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공간에 등장하는 타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정말 민정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구태연한 작업의 수단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민정을 사이에 두고 진흙탕 싸움을 시작할 것만 같았던 두 남자는 알고 보니 중학교 동창이었다. 영화의 얕은 갈등과 긴장이 급격히 해소되는 반전 포인트다. 두 남자는 서로를 기억해내고, 서로의 존재를 증명해주지만 각자가 기억해내는 과거의 사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그들이 정말 민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민정을 정말 알고 있기나 했던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동시에 민정과 영수를 갈등하게 만든 '타인의 기억'이 얼마나 가변적인 것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타인은 자기 자신의 실존과 행위의 진실에 앞설 수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소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구성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만큼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과 공간을 빙빙 돌다 다시 만난 민정과 영수. 민정은 영수 앞에서도 자신을 타인화 하고 관계의 주도권을 잡는다. 이번에는 영수도 민정에 동의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새롭게 정의할 기회를 만든다.
다시 두 사람은 갈등의 공간이었던 영수의 방과 좁은 침대 위에 나란히 자리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속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하고 또 서로를 함부로 정의하지도 않는다. 민정은 민정의 주도하에 그들의 관계를 정리하고 그 안에서 주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고 시원한 수박을 나눠 먹는다.
이번에도 그의 관객들은 그의 영화를 아득바득 열심히 읽어낼 것이다. 또 많은 평론가들도 이 영화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해석해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만큼은 철학으로 열심히 포장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영화의 본질은 배우 김민희와 홍상수 감독의 관계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죽도록 사랑이나 하고 싶다는 영수의 취중진담은 어느 때보다도 노골적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만큼은 '머리가 하얗지만 아기'같은 홍상수 감독의 자기변명이자 솔직한 해명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이 영화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도 그는 또 다음 영화를 통해 이렇게 말할 테니까.
"저를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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