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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호기 Aug 17. 2019

괜찮을 거야 우리집도 그래

영화 <우리집> 리뷰

 *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지만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되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의 얼굴을 사이에 두고 고성이 오간다. 아이는 쭈뼛거리며 양쪽을 번갈아 보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바짝 얼어붙은 아이를 곁에 두고 엄마와 아빠의 다툼이 계속된다. 꽤 심각한지 어린 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우리집>의 시선은 그 반대다. 영화의 카메라는 언성을 높이는 엄마와 아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오로지 아이의 표정, 그리고 아이의 몸짓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 윤가은 감독이 돌아왔다. 아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해 호평받았던 전작 <우리들>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집>이다. 전작과 타이틀이 비슷해서인지 그 반가움이 더한다. 거기에 배우들의 구성도 비슷하다. 이번에도 미묘한 감정선을 그리는 두 여자 아이와 귀여움을 담당하는 막내 동생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나간다.


 

하나 그리고 유미, 유진 자매


  전작을 본 관객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그 특별함이란 다름 아닌 ‘평범함’이다. 이번에도 아이들의 연기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보는 이의 마음을 기분 좋게 간지럽히고, 평범한 아이들만이 건넬 수 있는 작은 선물들이 영화 곳곳에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우리 주위의 아이들 혹은 우리가 어렸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또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깨끗한 스케치북에 내딛은 새 크레파스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는 영화를 다양한 색으로 가득 채워나간다. 어색한 꾸밈이나 과도한 화려함이 없는 그림이 지니는 깊은 매력을 느끼게 한다.


  사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처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는 말이 나올만하다. 아무리 전문 배우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 서면 어느 쪽으로든(얼어버리거나, 날아다니거나) 돌변하거나, 카메라를 의식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은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을 영화에 그대로 녹여낸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러한 순간들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윤가은 감독의 가장 강력한 힘이자 독보적인 감독의 색깔이다.


윤가은 감독과 배우들


  영화 <우리집>은 세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하나'에게 집이란 곧 ‘식구’고 ‘가족'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먹고 자는 공간이 바로 집인 것이다. 그런 하나의 집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부모의 갈등이다. 오빠의 지독한 사춘기는 덤이다. 하나는 집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다. 그 작은 손으로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하고, 막막한 가족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가족은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하나의 집은 계속해서 위태롭기만 하다.


하나에게 식탁은 곧 집과 같다


  반면 유미, 유진이에게 은 좀 더 본질적인 의미에 가깝다. 바로 '보금자리'로서의 공간이다. 형편상 유미의 집은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엄마와 아빠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미에게 집은 안정적인 공간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 누군가가 집에 찾아와 유미와 유진이를 내몰지 모른다는 불안이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미와 유진이의 집 역시 위태롭기만 하다.


유미, 유진이의 작은 집


  집 앞에 쌓여있는 폐지나 빈 상자들을 주어다 노는 유미와 유진이의 모습은 이러한 현실을 은유한다. 아이들은 남들이 내놓은 폐지들을 모아 상자를 만들고, 다시 그 상자들을 꾸며 집을 만들기도 한다. 모양은 그럴싸할지라도 속은 텅텅 비어있고 언제 허물어질지 아슬아슬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다 놓은 상자라는 점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한다. 하물며 집 앞을 어지럽힌다고 집주인에게 혼나는 처지 또한 낯설지 않다.


  하나 역시 상자를 들고 나타난다. 하나의 상자는 유미와 유진이의 상자에 비하면 단단하고 좋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집을 위태롭게 만든 원흉(?)이 들어있다. 그리고 아무나 열어볼 수 없도록 테이프로 꽁꽁 봉인되어 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는 하나의 모습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아이들의 상자는 곧 아이들이 처한 현실이자 아이들의 집인 셈이다.


  이처럼 영화 <우리집>은 전작 <우리들>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상징물과 복선들이 등장한다. 전작에 비해 영화가 훨씬 더 ‘어른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러한 점에 아쉬움을 느끼는 관객들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의미를 찾아보고 해석해보는 즐거움이 더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유진이가 하나에게 건네는 '빈 소라 껍데기' 또한 매우 흥미로운 소재다. 소라 껍데기 또한 무언가의 든든한 집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하기 싫은 이유로 지금은 속이 텅 비어있다. 그리고 빈 소라 껍데기를 주고받은 아이들이 함께 바다로 떠나게 되는 것 또한 그럴싸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와 유민이의 만남은, 각기 다른 중요한 요소가 결핍되어 있는 두 집의 만남이자 상처와 또 다른 상처의 만남이다. 보기에 조금 다른 듯한 두 사람의 상처는 마치 자석의 다른 극이 가까워지듯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러던 두 아이는 함께 상자를 모아 집을 짓기 시작한다. 엄마 아빠가 다투는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월세도 보증금도 없다. 집을 보러 오는 낯선 타인도 없으며 색도 원하는 대로 칠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집이다.



  하지만 자석이 그렇듯 두 사람의 상처 역시 어느 한순간 ‘탁’하고 충돌하고 만다. 두 사람이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자 두 상처가 충돌하는 순간이다. 아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같은 처지였음을 느낀다. 그리고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아이들은 버텨내야 할 이유도, 포기해야 할 이유도 모를 삶의 한 상자를 덤덤하게 쌓아 올린다.


  어떤 형태로든 누구에게나 집이 있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어렸을 적 집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디 하나 똑같은 집은 없을 테지만 집은 숱한 갈등과 상실, 그리고 다양한 기쁨과 탄생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물론 외로움도 있다. 그래서 집은 당장 떠나버리고 싶기도 또 때로는 바닥에 붙어있고 싶기도 한 공간이다.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어렸을 적 집은 그런 공간이었다. 나의 집은 작은 우주 같아서 식구들이 별처럼 빙글빙글 자전을 하고 또 공전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서로 멀어지기도 또 가까워지기도 했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다시 식사를 차리는 하나.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유미, 유진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한마디가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어쩌면 하나가 유미에게, 또 유미는 하나에게 서로 토닥이며 주고받았을 말일지도 모르겠다.

 

괜찮을 거야. 우리집도 그래.


무대 인사 중인 윤가은 감독과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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