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비롯해 집안의 형제들이 모두 공부를 많이 한 탓에 어릴때부터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다. 한글 서적은 물론, 이름 모를 영어 원서와 일본어로 된 책, 아버지가 취미로 하던 악기 연주에 관한 책과 악보들을 비롯해 집은 거의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었다. 하지만 나는 활자로 된 책보다는 만화책을 많이 봤으며, 티비 보기, 그림 그리기 등을 더 즐겨했다. 반항심에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나는 이미지 언어에 더 이끌렸을 뿐이다.
내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1970년대 초반에 본 만화는 주로 일본 만화였다. '우주소년 아톰', '바벨 2세', '도전자 허리케인', '타이거 마스크', '태양을 쳐라', '은발의 아리사' 등이 내가 어릴 때 완전히 빠져서 영혼을 바친 만화들이다.
지금 보면 만화사의 획을 그은 명작들인데, 그 당시에는 저자와 등장인물들이 모두 한국사람으로 되어 있었고, 한국만화잡지 부록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것이어서 세계적인 명작이라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다만 너무 재미있어서 한 달마다 손꼽아 잡지가 배달되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만화 장면을 수십장 모사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지만, 이 만화들에는 심오한 메시지와 비극적 정서가 깔려있었다. '우주소년 아톰'은 귀여운 그림체의 이면에 로봇과 인간 사이에서의 정체성 고민, 뿌리에 대한 탐구, 미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같은 SF 장르 특성적 요소들이 깔려있었다.
'바벨 2세' 역시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SF만화였는데, 스펙터클한 스케일과 바벨탑이라는 종교적이고 세기말적인 상징,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지점이 있는 매력적인 만화였다.
'도전자 허리케인', '타이거 마스크', '태양을 쳐라' 등의 스포츠 만화는 하층민의 굴곡 많은 삶과 인간승리 메시지가 약간 신파조로 표현된 만화였는데, '도전자 허리케인'의 비극적 엔딩은 그 정서의 최고봉이었다. 물론 이 엔딩에서 조가 죽은 것이지 산 것인지는 후에 논란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죽은 것으로 생각이 돼서 굉장히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타이거 마스크'의 주인공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도전자 허리케인'의 주인공처럼 고아원에서 자라서 그렇게 고생했음에도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으로 끝났다는 것이, 지금의 생각에도 애들이 봐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한 작품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은발의 아리사'는 복수극의 정석 같은 만화였다. 주인공이 지하 동굴에서 오랜 세월 복수의 칼을 갈고 지상으로 나왔을 때, 본인의 머리색이 은발로 변한 것을 발견하자 비명을 지르는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복수 자체의 카타르시스보다는, 복수를 위한 준비를 하는 지하 동굴 안의 신비한 세계에 강하게 이끌렸었다. 세상 어딘가 저런 지하세계가 있을 것 같은 기대와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 아무도 나를 못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상상 등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스토리들이 글로 쓰인 것보다 이미지로 연출되어 보여지는 것이 나에겐 훨씬 흥미로웠다. 진부한 스토리라 하더라도 이미지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매력이 숨어있다. 이미지에 함축되어 있는 요소들을 캐치하고 그것으로부터 메시지를 얻어낼 때의 기쁨은 내게는 활자 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활자언어의 장점인, 글을 읽고 스스로 그려낼 수 있는 상상력을, 이미지 언어는 사전에 확정해버리는 단점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글을 읽고 떠올리는 상상력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었고 별로 즐겁지 않았으며, 이미지 언어를 통해 진화해 나가는 상상력이 더 즐겁고 잘 맞았다.
물론 책을 읽기는 했다. 특히 아가사 크리스티 같은 추리작가의 소설은 여름방학 내내 방학숙제를 잊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외의 당시 어린이용 책이나 고전작품들은 내게 전혀 와 닿지 않았다. 그걸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처럼 여기는 문화도 싫었다. 그런 문화 때문에 점점 더 책에 대한 거부감이 강화되었다.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교 시절에는 전공서적도 겨우겨우 읽는 수준이었고, 한참 운동이 활발한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막스 레닌주의 서적들을 읽긴 했지만, 그 이외엔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책을 읽어야만 교양 있고 수준 높은 지성인이 된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국인들이 책을 안 읽어서 큰일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낙후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책이 출간되어 나오는 과정이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과정들을 보면 책이라는 것이 현실을 뛰어넘는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별로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나는 국어를 잘했으며 글쓰기도 잘해서 백일장 같은데에서 매번 상을 받아왔다. 비싼 사립 국민학교의 학부모들이 나의 부모에게 무슨 과외를 시키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커서는 큐레이터로서 미술에 대한 비평문을 쓰기도 했고 이런저런 지면에 칼럼도 몇 번 썼는데, 내가 전혀 만족을 못해서 그렇지, 글을 못쓴다거나 글이 고루하다는 평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글을 잘 썼던 부모의 유전자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언어에 대한 감각은 책을 많이 읽어서라기 보다는 논리적인 사고방식에서 길러지는 것 같다. 법칙의 이해, 기승전결, 수미상관, 정반합 등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방식이 언어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감이 발달해 있다면 언어감각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활자 언어보다 이미지 언어를 가까이하더라도 최소한 글 읽을 줄 알면 사는데 지장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책 읽기가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나의 경우엔 집에 책이 이미 많았기에 절실함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서 책 읽기가 관건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덧붙여, 어리다고 샤방샤방한 것만 봐야 한다는 법은 없다. 위의 저런 만화들은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들도 많다. 하지만 어린아이들도 그런 감정들을 느끼고 즐기고 조절할 줄 안다. 부모들이, 어른들이 아이들의 균형감각만 놓치지 않게 분위기를 조성해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주말에는 다 같이 모여 <수사반장>이라는 티비 드라마를 즐겨봤다. 심지어 우리가 다른 것을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수사반장 한다!!"라고 우리를 불렀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범죄에 둔감한 자가 되었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샤방샤방한 동화책을 많이 읽고 독서량이 많다고 해서 저절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